
한국은행과 금융당국이 주도하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시범사업 ‘프로젝트 한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디지털화폐의 실생활 적용 실험이 전국에서 펼쳐지고 있다. 시범사업은 4월1일∼6월30일 진행되며, 사전에 신청한 국민 10만명이 일반 이용자로 참여한다.
기자는 참여 은행 중 하나인 NH농협은행을 통해 전자지갑을 개설한 뒤 CBDC에 기반한 ‘예금 토큰’으로 하나로마트에서 물건을 사보기로 했다. 화폐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놓인 지금, 이번 실험에 참여한 이용자들은 어떤 변화를 느낄 수 있으며 CBDC는 어떤 의미를 가져다줄까.
◆“예금 토큰으로 결제할게요”=프로젝트 한강 사전 신청자는 4월1일부터 참여 은행 애플리케이션(앱)에서 전자지갑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다. 기자는 스마트폰에 설치된 ‘NH올원뱅크’ 앱을 통해 전자지갑을 개설했다. 고객인증확인, 본인명의 휴대전화 인증, 연동계좌 인증, 자동응답시스템(ARS) 인증 절차를 차례로 거치자 전자지갑이 생성됐다.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은 약 5분. 이어 기존 예금 중 일부를 디지털 예금 토큰으로 전환했다.
이제 사용해볼 일만 남았다. 인근 농협하나로마트에 가서 물건을 고른 후 계산대 앞에 섰다. 직원이 물건 바코드를 찍는 동안 재빨리 올원뱅크 앱을 켰고, 전자지갑 큐알(QR)코드를 미리 준비한 뒤 “예금 토큰으로 결제할게요”라고 말했다.
“삑-.” QR코드를 바코드 기기에 찍자 빠르게 결제가 완료됐다. 곧이어 현금영수증을 발급하겠냐는 직원의 질문이 이어졌다. ‘예금 토큰’으로 적혀 나온 영수증을 보니 신용카드도, 현금도, 모바일 간편결제도 아닌 거래가 새삼 신기했다. 이어 직원에게 예금 토큰으로 결제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직원은 “아직 (이용자가) 많지는 않다”면서 “결제 과정에서 현금영수증을 발급할 수 있다는 것 말고는 기존 간편결제 등과 큰 차이를 못 느낀다”고 답했다.
◆아직 한계 있는 디지털화폐 시스템=일반 이용자로서 가장 먼저 느낀 불편은 아직 시범사업 단계이기에 사용 가능한 매장이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현재 예금 토큰을 쓸 수 있는 오프라인 매장은 농협하나로마트, 이디야커피, 세븐일레븐 편의점, 교보문고 등이다.
또한 디지털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층이나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진입장벽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농촌지역에서는 간편결제를 이용하는 사람이 도시보다 훨씬 적은 편이다. 모바일 환경에 익숙하지 않은 정보통신(IT) 취약계층은 전자지갑 개설 등 모든 과정이 낯설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게다가 현재 국내 간편결제 시장은 이미 네이버페이, 카카오페이, 삼성페이, 애플페이 등 강력한 민간서비스 플랫폼들이 선점한 상황이다. 이들 플랫폼은 유통·포인트·금융을 아우르며 일상화됐다. 디지털화폐 결제 방식은 이들 플랫폼보다 훨씬 번거로웠다. 은행 앱을 열고 전자지갑에 들어가, 비밀번호를 한번 입력하고 QR코드를 띄운 뒤 비밀번호를 재입력해야 했다. 평소 간편결제를 이용하는 입장에선 ‘이걸 굳이 왜 써야 하지?’라는 의문이 드는 지점이었다.
◆공신력 있는 디지털화폐, 정착엔 시간 필요=한은과 금융당국은 CBDC의 도입이 지급·결제 시장의 혁신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예금 토큰 사용 시 판매처는 거래 대금을 (플랫폼을 거치지 않은 채) 즉시 받고, 카드와 달리 수수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며 “CBDC는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공신력 있는 화폐라는 점에서 민간서비스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디지털화폐 체험은 짧았지만 인상적이었다. 다만 국민 일상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사용자 친화성·확장성 등 여러 과제가 남아 있다.
디지털화폐는 단순히 결제수단의 변화가 아닌, 화폐 패러다임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향후 실물화폐를 온전히 없애고 디지털화폐로 전환하려는 목적은 아니다. 이종렬 한은 부총재보는 “실물화폐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가 있는데 한은은 실물화폐를 절대로 없애지 않는다”며 “우선 디지털화폐 시스템 생태계를 그려놓고 화폐 시스템의 신뢰를 유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은은 이번 시범사업 종료 후 이용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시스템을 정비한 후 후속 실거래를 진행할 예정이다. 후속 실거래에서는 프로그래밍 기능을 활용한 개인간 송금, 다양한 디지털 바우처프로그램 등 활용사례들을 추가 발굴해 적용할 계획이다.
박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