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겸 감독 박중훈이 얼마 전 에세이 『후회하지마』를 냈다. 광고 분야를 취재했던 경험 때문인지 그가 1990년대 맥주 광고 모델로 큰 인기를 끌었던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랄라라’ 노래를 부르며 흐느적대는 춤을 추던 맥주 광고 말이다.
당시 광고와 춤은 신드롬급 인기를 누렸다. 전국의 대형 바, 나이트클럽에서 ‘랄라라 댄스 경연대회’가 열릴 정도였다고 박중훈은 회상했다. 대마초 흡연으로 나락에 빠졌던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게 영화 ‘투캅스2’와 이 맥주 광고였다고 한다.
파격적인 광고와 APEC 홍보영상
발상 전환 수용한 결단 있어 가능
유연한 사회에서 창의성 꽃 피워
기존 맥주 광고는 재료와 제조 공정의 차별성을 앞세웠다. ‘랄라라’ 광고는 달랐다. 잘난 척하지 않고, 맥주를 마시는 즐거움을 강조했다. 직관적으로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요즘 광고도 기발한 게 많다. 배우 김우빈을 모델로 기술력을 코믹하게 풀어낸 모 중공업 광고가 대표적이다. 수출 역군, 기간 산업을 강조하는 그간의 중공업 광고는 업의 속성처럼 장중하고 진지했다. 재미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이 중공업 광고는 재미있다. 김우빈이 초대형 암모니아 운반선으로 사랑하는 여인을 집까지 바래다주는데, 당황한 여인이 외친다. “저 집이 용인인데요.”
용왕님 에피소드도 있다. 바다에 뛰어든 효녀 심청을 김우빈이 타고 있는 3000t급 잠수함이 구해준다. 정밀한 공격과 은밀한 작전 수행 능력을 과시하는 문구가 나온 뒤, 김우빈의 품에 안긴 심청이 묻는다. “용왕님?”
초대형 LNG운반선과 원유 운반선도 이처럼 위트있게 소개한다. 무겁고 멀게만 느껴졌던 중공업 브랜드가 소비자 옆에 바짝 당겨 앉은 느낌이다. ‘광고를 검색해서 찾아본 건 처음’이란 반응도 나온다.
김경호·김종서·박완규 등 ‘왕년’의 인기 가수를 기용한 이커머스 광고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의 히트곡을 상품·세일과 관련한 가사로 개사했다. 설운도의 ‘상하이 트위스트’의 가사 중 ‘상하이’를 ‘상의 하의’로 바꿔 부르는 식이다. 3040세대는 향수에 젖고, 젊은 층은 ‘병맛’에 환호했다.
부정적 개념을 긍정적으로 치환시킨 광고도 있다. ‘두통은 일을 향한 열정이고, 통증은 끊임없는 도전’이라는 카피의 진통 해열제 광고는 효능이 아닌 사람을 중심에 세웠다. 20년 전엔 ‘독도 문제로 5000만 국민이 머리 아파하는 건 애국심 때문’이란 카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건 얼룩이 아니라 너의 하루에 대한 기록’이라는 카피의 로봇청소기 광고는 아이들의 놀이 흔적을 일상의 행복이란 관점에서 바라본다.
화제의 중공업 광고, 이커머스 광고를 만든 영상 제작사 돌고래유괴단은 경주 APEC 정상회의 홍보 영상 ‘주차장에서 생긴 일’도 만들었다. 공항 안내원 장원영의 요청에 파일럿 지드래곤이 비행기를 후진하고, 이재명 대통령이 수신호로 비행기 주차를 유도하는 내용이다. ‘세계가 경주로 모인다’는 메시지를 유쾌하고 창의적으로 전달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창의적인 아이디어 못지않게 중요한 건, 결정권자의 열린 마음이다. 10년 전 망하기 직전의 돌고래유괴단을 회생시킨 카메라 광고엔 사진 찍다가 곰에 물려 죽은 모델 안정환·최현석의 영정 사진이 등장한다. 광고에 죽음이 들어가는 건 금기였지만, 광고주는 고심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를 계기로 사람들이 광고를 재미있는 콘텐트로 소비하기 시작했다.
박중훈의 맥주 광고도 광고주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너무나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두산그룹 회장,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낸 당시 박용만 부사장이 광고에 힘을 실어줬다. 뛰어난 소통 능력과 유연한 사고의 기업인으로 평가받는 그의 결단이 없었다면, 그 광고는 빛도 보지 못하고 사장됐을 것이다.
유명 광고제작자 이제석 대표는 “머릿속으로 와 닿지 않는 문제를 가슴으로 느끼게 만드는 일이 광고”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선 틀을 깨는 과감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돌고래유괴단 신우석 대표는 말했다. “능력보다 더 중요한 건 틀을 깨는 용기”라고.
그런 용기가 빛을 발하려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뭣 모르는 치기’로 매도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마련돼야 한다. 고정관념이 창의성과 혁신의 가장 큰 적이란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노력하지 않으면 고정관념도 뱃살처럼 두꺼워진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캐치프레이즈는 ‘이상해도 괜찮아(Stay Strange)’다. 이상한 것들도 동등한 의견으로, 하나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지는 유연한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