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지 않습니다.
아닌 건 어떻게 해도 아닙니다. 넘나들기 쉽도록 설치한 사거리 신호등이 아닙니다. 이리저리 옮겨 가도 무방한 온탕(溫湯)과 냉탕(冷湯)이 아닙니다. 선택 장애 손님을 위한 메뉴, 이를테면 ‘양념 반 프라이드 반 치킨’은 더더욱 아니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같을 수 없습니다. 다름과 틀림 역시 그렇습니다. ‘세상’이라는 울타리 속에 존재하지만, ‘세상’이라는 울타리를 둘로 가르는 ‘낮’과 ‘밤’처럼 별개의 존재입니다.
‘세상’이라는 울타리를 ‘그릇’으로 좁히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밥그릇도 국그릇도 모두 그릇입니다. 다만 그릇 안에 담는 음식에 따라 쓰임새가 다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밥그릇과 국그릇은 생김새와 쓰임새가 서로 다를 뿐이지 틀린 게 아닙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구라는 별에 사는 사람은 모두 다릅니다. 이름이 다르고, 모습이 다르고, 국적과 성별이 다르고, 말투와 성격이 다릅니다. 차이(差異)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때 생겨나는 게 차별(差別)입니다. 출신과 학벌과 성(性)과 인종에 대한 차별이 거기에서 싹텄습니다.
다름을 올곧게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틀림을 제대로 규정하지 못해도 심각한 문제가 일어납니다. 틀림은 말 그대로 틀린 것입니다. 망설일 필요 없이 ‘틀렸다’라고 알려줘야 온당합니다. 그때, 그러니까 틀림을 가려낼 때 필요한 잣대가 사회적 합의와 인간의 존엄입니다. 사회적 합의? 어려운 말 같지만 간단하고 명징합니다. 1 + 1 = 2처럼 말입니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된다고 온 인류가 약속한 것, 그것이 바로 사회적 합의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1 + 1 = 3이라는 셈법은 틀린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은 도덕과 윤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으로 넓혀 생각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누구에게나 고루 소중합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어리든 늙든 가리지 않고 소중한 생명체가 사람입니다. 그리 고귀한 사람의 생명과 권리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가 법(法)입니다. 법은 생명을 살리는 공기 같아서 음지(陰地)와 양지(陽地)를 가리지 않고 가득합니다. 그럼에도 틀림을 다름이라 주장하며 법을 무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법조차 무시하는 사람이 윤리와 도덕인들 대수겠습니까. 사람 목숨이야 어찌 되든 말든 잇속만 채우면 그만일밖에요.
틀린 건 어떻게 둘러대도 틀린 겁니다.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대통령도 그렇습니다. 군대는 국민의 생명과 안녕을 지키기 위한 총칼입니다. 그런 군대를 빼돌려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누라고 한 명령은 틀린 명령입니다. 틀림 중에서도 가장 질이 나쁜 틀림입니다. 권력을 누리기 위해서, 국민 하나쯤 어찌해도 좋다는 대통령은 틀린 대통령입니다. 나라 한구석쯤 부서져도 좋다는 대통령은 틀려도 한참 틀린 대통령입니다. 뿐이겠습니까. 틀린 대통령을 뒤에 감추고, 틀리지 않았다고 떼를 쓰며 우기는 것 역시 틀린 짓거리입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독립군의 은신처를 일러바치던 친일파가 어떠했는지. 시대는 한참 바뀌었지만, 틀림을 다름이라 꾸며대는 입과 혀는 여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