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태 지역 새 질서, 소다자주의에서 출발점 찾아야

2025-09-15

이제는 한국 외교 설계의 시간

지난달 말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은 환한 웃음으로 악수하며 공급망·기술·안보 협력을 역설했다. 동맹의 안정성과 신뢰를 강조하는 강력한 신호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조지아주에서 건설 중인 현대자동차·LG에너지솔루션 공장이 불법 근로 문제에 휘말리며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짧은 시기에 한국 외교는 ‘동맹 강화’라는 선언과 ‘현장의 정치적 제약’이란 현실을 동시에 목격했다.

올해는 쉬망 선언 75년, 유럽 통합은 작은 아이디어로 역사를 바꿔

동아시아도 실용적 프로젝트로 시작해 소다자주의 지렛대 삼아야

에너지 협력은 아시아·태평양 공동 인프라의 유용한 시험대 될 수도

한국 외교엔 줄 위의 곡예사 아닌 새 질서를 기획하는 설계자 필요

이 두 장면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패권의 정상에 있다. 군사력, 기술 표준, 글로벌 금융의 지렛대를 동시에 쥔 나라는 미국뿐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모든 길이 워싱턴으로 통하던 시대는 지났다. 동맹국과 파트너들은 더 이상 자동으로 미국을 따라가지 않는다.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 기반을 둔 미국의 산업정책은 동맹국 기업들을 곤경에 빠뜨리고, 유럽과 아시아는 대체 협력과 자율적 조정의 길을 동시에 찾고 있다.

미국은 중심이지만, 유일한 경로는 아니다. 새로운 질서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그것은 단일한 블록이나 항구적 동맹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조정되는 유동적인 구조다. 고정된 질서의 시대는 끝났다. 미래는 설계자들의 역량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75년 전 유럽 통합의 첫 발걸음

이런 때일수록 역사는 좋은 교과서가 된다. 1950년 5월 9일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쉬망은 장 모네가 설계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구상을 공식 선언했다. 오늘날 유럽연합(EU)은 이날을 ‘유럽의 날’로 기념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날이 조약 체결일도, 기구 발족일도 아닌 ‘아이디어를 제안한 날’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바로 그 작은 제안이 유럽을 바꿨다. 당시 유럽은 폐허였고, 독일을 어떻게 다룰지가 모든 나라의 고민이었다. 석탄과 철강은 군수산업의 심장이었다. 유럽 국가들은 서로의 자원을 필요로 했고, 공동 관리 없이는 또 다른 갈등이 불가피했다. 쉬망과 모네는 새로운 미래를 설계했고, 실제 동력은 이미 존재하던 산업 네트워크와 상호 의존성에서 찾아졌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는 초국가적인 기구를 통해 생산과 가격을 공동 관리했고, 그 출발은 시간이 지나 대륙의 구조를 바꾸는 씨앗이 됐다.

올해는 쉬망 선언 75주년이다. 장 모네는 지금도 유럽통합의 아버지로 기려지고, 그의 이름을 딴 프로젝트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는 거창한 비전의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을 꿰뚫은 제안자이자 수행가였다.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 이를 밀어붙인 쉬망 외무장관, 위험을 공유한 다섯 개국 정상들이 있었기에 첫 발걸음이 가능했다.

수동적 균형 아닌 기획 외교로

오늘의 한국 외교는 여전히 균형의 언어에 머물러 있다. 한·일, 한·미 정상회담 직후 중국 전승절에 사절 참석은 균형의 제스처로 읽혔다. 그러나 이는 전략이라기보다는 단기적 조율에 가까웠다. 미·중 경쟁의 지속과 북·중·러 연대의 강화는 한국이 동아시아 지정학의 안정된 균형점 위에 자리 잡기 어렵게 만들었다. 실제로 중견국 외교에 있어서 균형은 의도적 산물로 나오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한국이 기획하고 설계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답은 소다자(minilateral) 협력에서 찾을 수 있다. 역내국들의 필수불가결한 이해관계가 중첩된 에너지 협력은 유용한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에너지 협력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21세기판 석탄철강공동체’로 기능할 수 있다.

첫째 한·일간 에너지 협력을 들 수 있다 한국은 원전과 액화천연가스(LNG) 인프라, 배터리에서 강점을 보유하고, 일본은 수소·암모니아 혼소 기술을 축적했다. 두 나라는 역사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산업적으로는 긴밀히 연결돼 있다. 프랑스와 독일이 석탄과 철강으로 손을 잡았듯이 한국과 일본은 에너지 수급과 전환을 공동 설계하면서 상호 이익을 증진할 수 있다.

둘째 한·일 에너지 협력은 한·미·일 차원으로 확대될 수 있다. 미국은 알래스카 가스전을 비롯한 막대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고, 아시아 시장을 확대하려 하고 있다. 알래스카 LNG 개발 프로젝트는 한·미·일이 공동으로 수행해야 하는 전략적 인프라 사업이다. 위험 요소들이 상존한 거대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세 나라가 투자 비용에서 정책 지원까지 긴밀한 협의가 필요하다. 나아가 이들 국가가 수송·보험·인증 체계를 표준화한다면 이는 보다 진전된 제도적 공동체의 기초가 될 수 있다.

셋째 호주와의 전략자원 협력을 추진할 수 있다. 호주는 자원 부국이다. 석탄·천연가스·리튬·희토류에서 세계적인 공급국이다. 한국과 일본에 호주가 자원을 공급하는 구조는 이미 형성돼 있다. 이를 제도적으로 묶어내면 동북아시아~호주를 잇는 에너지 연대가 현실화된다. 안정된 공급망 확보 차원에서도 전략적 가치가 높다.

이제 한국은 설계자로 나서야

이러한 단계적 구조는 단순한 자원 수급 만이 아니라 공동 투자, 공동 표준 및 인증, 그리고 위기관리 체계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가 가격과 생산 조정을 넘어 유럽 평화의 제도적 틀을 만들었듯이 한국 주도의 소다자 에너지 협력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신뢰를 제도화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 출발점이 거창할 필요는 없다.

오늘의 국제질서는 고정된 블록이 아니다. 미국 중심 공급망 구상은 수정을 거듭했고, 유럽의 통합도 회원국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여러 경로에서 수용해 왔다.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AUKUS(미국·영국·호주의 안보동맹)조차 예외와 부분 조정의 여지를 열어둔다. 유연하지 않은 질서는 지속되지 않는다. 열린 구조란 ‘모두 같은 규칙’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달라도 작동할 수 있는 규칙’을 만드는 것이다. 참여국이 다양한 방식으로 기여하면서도 하나의 플랫폼을 형성하는 방식이 현재와 같은 변동기 국제정치·경제에 적합하다.

이제 한국은 균형자가 아니라 설계자로 나서야 한다. 한국은 그동안 미국·중국·유럽·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 등 여러 주체와의 안보·경제·개발 협력의 관계를 유지해 왔다. 바로 이 다중 연결성이 설계의 자산이자 시작점이다.

변화와 질서 사이, 한국 외교의 새 옷

변화는 빠르게, 질서는 느리게 움직인다. 이 속도의 차이가 불안정을 낳지만, 동시에 전략의 공간도 만든다. 외교의 전략은 바로 이 간극을 메우는 일이다. 소다자주의는 그 도구가 될 수 있다. 소다자주의는 ‘편을 바꾸는 외교’가 아니다. 오히려 확장 가능한 소다자 협력기구를 여러 개 운용하는 것은 한국의 외교적 고립을 막고, 전략적 자율성을 극대화한다. 역사는 이를 증명한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는 제한적 협력에서 출발했지만, 그것이 제도화되면서 점차 외연이 확장됐고, 그 과정에서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를 이끌어냈다.

2025년의 세계는 1945년 얄타회담 직후와 닮았다. 강대국의 합의가 세계를 쪼갰던 그 시절처럼 지금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러 경쟁은 국제질서를 흔들고 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 한국은 더 이상 과거처럼 수동적 대상이 아니다. 반도체·배터리 같은 첨단산업, 기술력에 기반을 둔 방위산업, 문화와 예술의 소프트파워는 한국을 국제적 중심축의 하나로 끌어올렸다.

어느 순간, 입고 있던 옷이 맞지 않게 되는 때가 있다. 어느새 몸집이 커졌기 때문이다. 외교의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은 단순한 스타일의 변화가 아니라, 사고방식의 전환을 뜻한다. 과거처럼 균형점을 수동적으로 찾아다니는 외교는 이제 한계에 이르렀다. 한국은 무대를 바꾸는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설계자가 돼야 한다.

동아시아에서 다시 소환한 장 모네

쉬망 선언은 화려한 정상회의가 아니라 제안자와 정치인의 결단, 다섯 개국 정상의 동의가 만든 작은 아이디어의 산물이었다. 그것이 유럽의 ‘Day-1’이었다. 한국도 이제 그런 제안을 할 때가 됐다.

거창할 필요는 없다. 미국이 반대할 아이디어를 밀어붙일 수도 없다. 그러나 한·일, 한·미·일, 호주를 엮는 시도는 이미 존재하는 제도적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고, 에너지와 자원이라는 구체적 의제를 담을 수 있다. 일본과의 공동 대응은 프랑스·독일의 축처럼 지렛대 역할을 한다. 실용적인 연계를 만들어낸다면, 인도·태평양, 유럽, 동남아로 자연스럽게 확장될 수 있다.

한국 외교에 필요한 것은 줄 위의 곡예사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기획하는 설계자다. 그것이 지금 한국 외교가 입어야 할 새 옷이다. 장 모네가 유럽을 바꿨듯이 한국도 동아시아에서 설계의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 정착도 그 그림 안에서 더 구체화될 수 있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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