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자의 소소월드] ① 헤어스타일의 정치학
소소(小騷)월드: 소소하게 소란스러웠던 세계 이야기를 전합니다.


썩어가는 옥수수수염, 황금 솜사탕, 바람에도 끄떡없는 초강력 접착 건초더미… 전 세계 누리꾼들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묘사한 표현들이다. 나풀거리는 금색 모발이 신기하리만큼 견고하게 고정된 모양새가 유별나게 느껴져서일까. 트럼프의 헤어스타일은 예측을 벗어나는 그의 행보만큼 이목을 끌곤 한다.
사실 정치인의 헤어스타일은 치밀하게 계산된 ‘이미지 메이킹’ 도구다. 정장 차림을 고수하는 정치인에게 머리카락은 멋을 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신체 부위다. 얼굴을 돋보이게 하되, 미용실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한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그래서 너무 튀지 않으면서도 대중에게 신뢰를 주는 단정한 스타일을 선호한다.
이는 선거 승패를 가르는 결정타가 되기도 한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TV 대선 후보 토론이 이뤄졌던 1960년 당시 민주당 존 F 케네디 후보는 풍성한 머리숱과 자신감 있는 태도로 젊고 유능한 지도자 이미지를 굳혔다. 반면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후보는 M자 탈모가 시작돼 넓어진 이마에 화장하지 않은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섰다. 닉슨은 케네디보다 불과 네 살 많았지만, 화면상으로는 아파 보이기까지 한, 나이 많은 정치인처럼 비쳤다. 결국 미국 유권자는 케네디를 다음 지도자로 선택했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의 헤어스타일은 전형적인 정치인의 그것과 다르다. 머리 앞쪽 금색 모발을 인위적으로 빗어넘겨 볼륨감을 만들었는데, 2004년 미국 TV 리얼리티쇼 <어프렌티스>에 출연할 때부터 지금의 스타일을 유지했다. 윤혜미 이미지 평론가는 “트럼프 대통령이 금발을 유지하는 이유는 정통 미국인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인데, 과도한 볼륨을 넣은 스타일링으로 기존 정치인의 룰을 따르지 않는다는 차별성을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관심을 끌기 위한 과장된 스타일이 대중에게 먹히자 이를 고수하는 것으로 정치에도 쇼비즈니스적 요소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독특한 헤어스타일로 대통령이 된 사례도 있다.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남미의 트럼프’라는 별명처럼 헝클어진 머리에 뺨까지 내려온 구레나룻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밀레이의 헤어스타일을 만든 스타일리스트 릴리아 레모이네는 2023년 영국 주간지 옵서버에 “엘비스 프레슬리와 마블 캐릭터 울버린을 조합했다”면서 “밀레이는 공격적이지만 이유 없이 누군가를 죽이지 않는 울버린을 닮았다”고 밝혔다. 전기톱을 들고 헝클어진 머리를 흔들며 아르헨티나의 병폐를 도려내겠다고 외친 ‘울버린’ 전략은 먹혀들었고, 밀레이는 2023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튀는 헤어스타일로 ‘차별화’를 내세웠던 지도자는 영국에도 있다.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는 부스스한 금발 머리로 ‘대걸레 머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영국 저널리스트 소니아 퍼넬은 폴리티코 유럽판에 “그는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무자비하고 야심 찬 사람이지만 수더분한 헤어스타일로 사람들을 무장해제시킨다”고 해석했다.
트럼프, 밀레이, 존슨 모두 우파 정치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퀸메리런던대학교의 정치학 교수 팀 베일은 가디언에 “모든 정치인은 브랜드를 가지고 있지만, 포퓰리즘 정치인이라면 브랜드를 더 크게 만들고 싶어 한다”며 “머리카락은 브랜드 일부이기 때문에 특이한 헤어스타일은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킬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단,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머리 모양은 엇비슷하다. 깔끔하게 빗어넘긴 2 대 8 가르마가 대세다. 윤 평론가는 “우리나라에서는 튀지 않는 문화가 존중받는다”면서 “한국인은 정치인의 권위를 중시하기 때문에, 그 이미지를 벗어난 스타일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또한 퍼스널이미지브랜딩 LAB & PSPA 박영실 대표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헤어스타일로 리스크를 주려 하지 않는다. 개성을 살리는 것보다는 유능하고 신뢰감을 주는 스타일이 이미지 메이킹에 더 효과적이라 여기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헤어스타일이 정치적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머리 모양으로 대중이 원하는 캐릭터를 연기할 수는 있지만, 머리카락에 숨긴 진짜 모습은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