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개명기에 모로하시 데쓰지(諸橋轍次·1883~1982·사진)는 독학으로 한학에 몰두하다가 일생의 과업으로 한자 사전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1922년부터 집필에 착수했다. 1927년에야 제1권을 탈고하고 출판을 서두른다.
그러나 1923년 관동(關東)대지진과 1941년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원고가 모두 불타버렸다. 사전 작업을 도와주던 도제(徒弟) 4명이 전화(戰禍)로 목숨을 잃었다. 그래도 낙심하지 않고 교정지를 찾아 다시 제작을 재개했다.
사전 작업 착수 뒤 24년이 지나자 모로하시는 과로로 오른쪽 눈을 실명하고 왼쪽 눈으로 겨우 사물의 형체를 알아봤다. 절망하고 있을 때 의과대학에 진학한 장남 도시오(敏夫)가 학업을 포기하고 작업에 참여했으며, 차남 게이스케(啓介)와 삼남 모리오(莊夫)도 도왔다.
그들에게 중요한 덕목은 가업(家業) 의식이었다. 피나는 노력의 결실로 집필 시작 37년 만인 1959년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을 완간했다. 총 13책, 1만4332쪽에 한자 4만8902자로 구성된 단어를 수록했다. 인류 역사상 필자 한 명의 이름으로 출간한 가장 방대한 원고량이다. 다이슈칸쇼텐(大修館書店)이 사운을 걸고 4년을 투입해 인쇄했다.
사전이 출판되자 가장 당황한 것은 중국인들이었다. 중국에서도 이만한 사전이 없는데 일본에서 방대한 사전이 출판되자 대륙과 대만에서도 새로운 자전 편찬에 착수했다. 그러나 모로하시의 노작을 능가하는 사전은 출판되지 않았다. 시력까지 잃으며 37년을 헌신한 2대에 걸친 모로하시 네 부자의 의지와 출판사의 의지는 물질의 힘이 아니라 일본 지성사의 승리다.
한국에는 민족주의적 지성사가 일본에 견주어 뒤떨어져 있다. 도쿄대 문리대 교수를 역임한 모로하시는 『공자 노자 석가』를 출간하고 백수(白壽)를 누리고 타계했다. 공부 열심히 하면 일찍 죽는다는 말도 괜한 소리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