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레의 종주국은 프랑스지만, 우리는 대개 발레 하면 러시아를 떠올린다. ‘발레=러시아’ 등식이 성립한 데는 차이콥스키의 고전발레 3부작이 한몫했다. 세계가 사랑하는 레퍼토리로 자리 잡은 ‘백조의 호수’와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이 그것이다. 이 불멸의 고전을 이야기할 때는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 마린스키와 볼쇼이 극장도 함께 기억하는 게 좋다. 한몸인 관계여서다.
물론 러시아 발레가 고전에만 강한 건 아니다. 당대의 경향을 포착한 컨템포러리 발레도 선도했다. 주도하기보다 차라리 ‘창조했다’라는 표현이 낫겠다. 그 중심에 한 위대한 흥행사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다. 직접 예술가는 아니라지만 공연사에서 ‘전설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다. 얼마나 닮고 싶은 인물이었으면 이 이름을 앞세워 창작 뮤지컬이 제작될까 싶다.
창작에 가담한 예술가는 아니지만
디아길레프는 러 발레 발전의 주역
한국서도 발레에 대한 관심 커져
K발레를 세계에 빛낼 인물 나오길

우선 이력이 독특한 데, 디아길레프는 법학을 전공했다. 비범한 인물에게 현실적인 전공 따위를 능가하는 것은 ‘끼’ 즉 DNA다. 그 끼를 주체하지 못해 음악을 공부하고 예술잡지를 만드는 등 예술적 취향을 확신한 끝에 그가 이른 곳이 발레였다.
기존 황실(皇室) 클래식 발레의 형식주의에 대한 반감에다 새로운 영역에 대한 갈망을 뒤섞어 디아길레프가 자신의 브랜드로 세상에 내놓은 게 발레 뤼스다. 고국의 이름을 딴 ‘러시아 발레단’이라는 단순한 이름이지만, 그 속에 내포한 의미는 심장하다. 그는 전통적인 러시아 고전발레 너머의 ‘신식 발레’를 지향했다. 예술이 당대의 욕망과 소비에 집중한다는 뜻에서, 요새 흔히 쓰는 말로 하면 컨템포러리 발레다. 20세기 초반 벨 에포크(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 평화롭던 예술의 융성기)의 파리와 런던은 그에게 최상의 놀이터였다.
역사에 길이 남을 신식 발레 레퍼토리와 예술가들이 1909년부터 1929년까지 20년 동안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를 통해 빛을 봤다. 지금도 공연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작품으로 알려진 ‘봄의 제전’(이고르 스트라빈스키)과 ‘세헤라자데’(림스키 코르사코프), ‘목신의 오후’(클로드 드뷔시) 등이 이곳에서 나왔다. 무용수와 안무가는 더 말할 것도 없어서, 바슬라프 니진스키와 안나 파블로바, 이다 루빈스타인, 미하일 포킨 등이 활약했다. 후반기 스타 조지 발란신은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시티 발레단의 창업주이자 안무가로 커다란 발자국을 남겼다. 미술가 파블로 피카소와 의상 디자이너 코코 샤넬도 발레 뤼스를 거쳤다. 숱한 논란 속의 파란만장한 여정에서 이 모든 것을 설계하고 지휘하고 흥행시킨 인물이 디아길레프다.
족탈불급이긴 하나 디아길레프를 보면 문화예술에서 혁신과 창조는 ‘특화한’ 예술가만이 전유하는 가치는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비록 창작에 직접 가담하는 예술가는 아니지만, 예술 영역의 주변에서 다양한 활동과 역할을 하는 사람들도 예술가 이상으로 중요한 창작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유형으로 치면 기획자와 제작자, 예술경영가, 심지어 흥행사 등이 여기에 속할 수 있겠다. 감히 ‘디아길레프형 예술가’라고 할까. 특히 어떤 형태로든 예술소비자인 관객의 참여와 개입이 열려있는 최근 공연의 흐름(종종 화제가 되는 이머시브 공연 같은)을 보면 이 논리의 확장도 예상할 수 있다.
시작을 발레로 했으니 발레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겉으로 한국 발레는 ‘현재 성장 중’이라는 인상을 준다. 발레리노 전민철 같은 ‘영 건’(젊은 유망주)이 등장하여 이목을 사로잡고, 각종 방송 등 미디어에서도 발레 붐에 편승하고 있다. 요 몇 년 사이에 시의 지원을 받는 공립단체인 서울시발레단과 부산오페라하우스발레단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창단됐다. 국립과 광주시립 이후 공립발레단의 출범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어서 ‘K발레’에 대한 높아진 관심을 실감한다.
이 두 신생 단체까지 참가하여 예전보다 더 풍성해진 제15회 대한민국발레축제가 오는 9일부터 열린다. 적은 예산에 좌절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해 스스로 만족할 게 아니라, K발레 중흥기에 상응하는 성과를 냈으면 좋겠다. 이런 굵직한 행사를 통해 머지않아 세계 무대에 K발레를 빛낼 당찬 ‘한국의 디아길레프’ 탄생을 기대해도 될까. 발레계는 특별하고 전문적인 장르라는 자부심 때문인지 자기 지향이 강하다. 그래서 이런 유형의 흥행사를 더욱 염원하는지도 모르겠다.
정재왈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