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 있는 퇴진은 형용 모순이다. 전투에 패한 군인이 우왕좌왕하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퇴각할 수 있겠나. 도망이라면 무릇 삼십육계 줄행랑이다. 대통령이 계엄을 저지르고, 여당은 소수에 불과하며, 광장의 민심은 사나운데 한동훈 대표와 친윤계 등 집권세력이 권력의 순조로운 이양을 꾀하겠다는 건 사실상 초현실주의에 가깝다.
그런데도 이를 고집하는 건 8년 전 탄핵 트라우마와 무관치 않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거치면서 우파 진영은 궤멸했고, 찬동한 이는 배신자로 퇴출당했다. 단순한 거부감을 넘어 ‘탄핵 대통령’ 2연속 배출은 치욕이자 향후 우파의 집권 자체가 아예 불가능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지지층에선 팽배하다. 이런 분위기에서 탄핵에 가담한다? 여당으로선 쉽지 않은 선택이다.
거국 내각, 조기 하야 등 분출하지만
퇴진 로드맵 정리 못한 채 혼란 가중
내부 권력다툼만 하다 휩쓸려갈 듯
또 다른 이유는 '이재명 변수'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지난달 15일 선거법 재판에서 피선거권 박탈형(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강조하는 6ㆍ3ㆍ3 규정(선거법 1심은 6개월 이내, 2ㆍ3심은 각각 3개월 이내)을 엄격히 적용하면 이 대표의 최종 선고는 내년 상반기에 나올 수 있다. 반면에 탄핵의 경우, 박 전 대통령 사례에서 보듯 국회 통과(2016년 12월)→헌법재판소 인용(2017년 3월)→대선 실시(2017년 5월)까지 5개월이면 족하다. 탄핵이 국회에서 통과되면 이 대표 최종 선고 전에 대선이 열릴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인데, 이를 순순히 따라갈 수 없다는 게 여권의 속내다. 결국 ^대통령 직무정지를 통한 정국 안정 ^탄핵보다 다소 늦은 대선이 현재 여권이 상정하는 질서 있는 퇴진의 필요조건이다.
문제는 방법론이다. 일단 임기 단축 개헌은 물 건너갔다. 2026년 대선-지방선거 동시 실시는 시기적으로 너무 멀다. 앞서 한 대표가 피력했던 “대통령의 사실상 직무배제” 등은 위헌 시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야당이 주장하는 ‘대통령 즉각 하야’는 윤석열 대통령이 받아들일 리 없고, 60일 이내 대선이기에 여당도 수용 불가다.
그나마 현실성 있는 시나리오는 대통령 2선 후퇴-거국 중립내각 구성이다. 친한계에서 나오는 '조기 하야'와 비슷한 맥락이다. 대통령이 자진 사퇴 의사를 천명하고 일정 기간 2선 후퇴하면, 야당이 추천한 총리가 국정을 총괄하면서 대선을 치르는 방식이다. 정국 안정화에 방점이 찍힌 정치적 해법이다. 박 전 대통령 탄핵 때도 ‘4월 퇴진-6월 대선’은 유력한 안이었다. 당시엔 오히려 박 전 대통령이 거부했다. 이번엔 하루라도 빨리 탄핵을 관철하려는 야당이 반대할 게 뻔하다. “이미 탄핵을 겪지 않았나. 대한민국 멀쩡했다. 꼼수 부리지 마라”는 논리다.
그래서 묘수처럼 부상하는 게 대통령 인신 구속이다. 다소 극단적이나 현재 검경의 수사 속도로 볼 때는 불가능한 현실도 아니다. 대통령이 체포·구속되면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사고(事故)’ 상태로 봐야 한다는 게 헌법학계 다수설이다. 헌법상 대통령 사고의 경우 국무총리가 권한대행을 맡지만 대선 시기에 대한 조항은 없다. 윤 대통령 직무는 강제로 정지시키면서 대선 시기는 여야가 협의할 수밖에 없으니, 여권이 원하는 질서 있는 퇴진에는 부합한다. 다만 “대통령이 구속된 마당에 탄핵을 막는 게 말이 되느냐”는 파상공세를 버틸지는 의문이다.
이처럼 각론에 들어가면 질서 있는 퇴진을 구현해 내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여태 '퇴진 로드맵'이 제대로 나오지 못한 이유다. 더 볼썽사나운 건 마음이 콩밭에 있는 듯한 모습이다. 친윤계에선 "조기 퇴진하라니, 차라리 탄핵이 낫다. 법리적으로 다투겠다"는 말이 나온다. 후임 원내대표를 두고는 계파 싸움이 치열하다. '친한계 장동혁 최고위원을 꼬드겨 현 지도부를 무너뜨리자'는 소문도 무성하다. 영락없는 난파선의 전형이다. 극도로 혼란한 이들이 '질서 있는'을 운운하다니, 그야말로 블랙코미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