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Q. 자기소개 부탁한다.
갤러리혜를 2022년부터 시작하게 된 박창홍이다. 반갑다.
시민단체 활동에서 해상풍력으로, 그리고 갤러리혜까지
Q. 최근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데, 관심 분야가 많다. 시민단체 활동도 하고, 오늘은 나사리에 탈핵(시위)하는 데, 인접 주민 이주대책위원회 상여 시위하는 데 갔다 왔다. 탈핵(운동)을 하다 보니까 해상풍력도 연관이 됐고, 재생에너지에 관심을 가지고 시민 활동을 하다 보니까 언론 ‘기레기전’ 있잖아, 그걸 전시하기 위해서 갤러리까지 개관하게 됐다. 모두 다 연관이 돼 있다.
Q. 갤러리혜 이야기부터 해보자. 과정이 무척 재밌다.
갤러리혜에서 <사랑하니까 그리는 거야> 두 번째 전시회를 열고 있다. 박찬우 작가라고, 언론개혁 프로젝트 진행하는 작가.
지금까지 우리가 조선일보 반대 마라톤이라든지 조중동(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개혁 관련된 여러 가지 활동을 했는데, 그 언론사를 타격하려고 했지만 실제로 쉽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금세 잊히곤 했는데, 이 작가는 그 언론사에 소속된 기자 중에서 왜곡된 뉴스라든지 굉장히 편향된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에게 말풍선을 달아서 풍자하는 캐리커처를 그려 기자를 박제화시킨 거다.
사회적으로 좀 파장이 있었다. 최초로 그렇게 했기 때문에. 예를 들어 SBS 누구누구 기자 소속사와 실명을 밝혔기 때문에. 소송을 각오하고 했다고 하더라고. 실제로 소송을 당해서, 지금 몇억을 당했는데, 감옥에 가면 감옥에서도 계속 그리겠다는 입장이다.
내가 광주에서 파장이 컸던 (그 전시에 관해) 전해 들었다. 그때 이민정 교수가 나에게 울산에서 이런 걸 좀 해야 하지 않냐고 해서 처음에 도와주기 위해 참여했는데, 울산에서도 전시 공간이 마땅하지 않았다. 내 (건물에) 남는 공간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서 간단하게 진행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제안했고, 하다 보니까 일이 커져서 갤러리가 탄생하게 됐다.
한 달 가까이 박찬우 작가가 상주하면서 전시회를 열었고, 그 이후로 박찬우 작가와 나는 친형제처럼 지내고 있다, 그 인연으로 인해서.
Q. 남는 공간이 있다고 했는데, 주님 위의 건물주인가?
건물을 하나 가지고 있다. 5층짜리 건물이다.
세상에 맞서면서 얻은 우울증
Q. 울산의 정치, 사회, 환경 문제에 많이 관여한다. 그 와중에 상처받는 일도 많을 것 같다.
사실 짧은 인터뷰에서 말하기 어려울 만큼 할 말이 너무 많다.
사실 나는 우울증 환자이다. 기간이 굉장히 긴 조울성향의 우울증이라고 하더라, 주치의 선생이. (우울증 상태로) 들어갔다 나왔다, 를 반복했다. 스물다섯 살 때 처음 발현했다. 10년 동안 백화점 생활을 했는데, 백화점에 (고객의) 갑질이 되게 심하다. 그러다 보니까 서른다섯 살 때 두 번째 우울증이 왔다. 그때가 내 우울증세 중에서 가장 심했던 때다.
그 이후로 1, 2년 주기로 계속 들어갔다 나왔다, 30여 년간 13번 정도를 반복했다. 그 기간에 노무현 대통령 서거도 있었고 사건들이 많았지.
우리 가족이 피해를 본 동양사태라는 금융사태가 있었는데, 거기서도 내가 지역의 대표로 활동하다가 중앙에서 동양 비대위(비상대책위원회) 대표를 하게 됐다. 사람들이 나중에 배신하는 일이 생기게 되면서 상처를 많이 받아서 우울증을 한두 번 정도 겪었다. 그 이후로 컨디션이 안 좋을 때는 전화 받는 데 대해서 트라우마 같은 게 좀 생겼다. 지금은 많이 회복한 상태지만.
나 같은 경우에 우울증이 처음에는 굉장히 깊고 짧게 이어지다가 지금은 고무줄 늘이듯이 쭉 늘어져서 얕으면서도 기간이 굉장히 길어지는 거야. 마지막 우울증이 일 년 반 (정도 지속됐던 거) 같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의사와) 상의하니까 매일매일 약을 먹으면서 괜찮을 때 관리하자, 그래서 3년 전부터, 2022년 1월 1일부터 약을 매일 먹고 있다. 오늘도 먹고 왔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지 않아 평생 부채감을 안고 산다
Q. 광범위한 활동의 계기가 있었을 것 같다.
크게 한두 가지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한 가지는 내가 역사에 대한 호기심이 기본적으로 좀 많았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나라가 끊임없이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는 것을 보면서 의아했는데, 근대사에 대해서는 고등학교에서 배울 땐 짧았다. 알려주지 않았고.
그런 호기심이 있었던 게 하나이고, 두 번째는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 거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되기 전 내가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활동을 했는데, 그때는 그냥 들여다보는 정도였다. 그 이후 ‘국민의 힘’이라고, 지금 (국민의힘) 정당하고 이름이 똑같은데, ‘국민의 힘’ 시민단체 활동을 했었다.
그땐 내가 백화점에 매여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조선일보 반대 마라톤이라든지 여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거기서 정말 글 잘 쓰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거기서 내가 눈팅(눈+채팅)하면서 많이 배웠다. 그 기간에 ‘서프라이즈’라는 정치 웹진이 있었다. 여러 논객들의 글을 보면서도 많이 배웠지.
대학 때는 운동권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물론 87년도 6월 항쟁 때는 3개월 정도 참여는 했다. (누구나) 다 (참여)할 때니까. 6·29 선언 때 도저히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겠더라고. 그리고 다 (시위를) 그만둘 때 나도 그만뒀고.
그렇지만 졸업한 이후 내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게) 미안한 감정이랄까, 부채감 같은 게 있었다. 그런 게 종합적으로 내가 시민단체 활동하는 데 영향을 많이 끼치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한다.
가족에게 가장 미안하다. 이혼당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소소한 삶
Q. 희생이라는 말이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그런 활동에서 희생이 있었을 것 같다. 사적인 영역 즉, 가족들의 희생.
일종의 데미지라고 생각하는데, (사회운동 참여와 가족의 만족 모두를) 다 같이 가져갈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가 돈만 좇는 거였다면.
당시 내가 귀금속을 했다. 부친 때부터 귀금속을 했고, 울산에서는 귀금속 1세대이다. 내가 대학 졸업하고 별도로 보석 감정을 공부하고 백화점에서 15년 정도 귀금속업을 했다. 내가 장사를 잘했다. 그래서 건물도 올렸고.
그런데 우울증이 계속 왔다 갔다 하니까 이대로는 죽을 것 같은 거야. 그래서 내가 딱 멈췄다. 어느 순간 딱 멈췄다. 그 시기에 동양사태가 있었고. 스스로에게 휴식을 주면서 (귀금속업에) 다시 복귀하려고 했는데 동양사태가 터지면서 자연스럽게 은퇴하는 게 됐다.
그러다 보니까 생활비나 이런 부분이 십몇 년째 거의 동결이거든, 동결. 그런 부분에 대해서 집사람이나 부모님은 많이 걱정하는데, 동양사태는 부모님 때문에 연루됐던 거라서 인정했지만, 나중에는 집사람도 (내 행동을) 이해를 못 하지. 그런 기본적인 갈등이 있다.
그런 갈등은 내가 극복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서 그전에는 집안일을 일절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설거지, 간단한 요리는 내가 다 해 먹고, 집사람은 한 번씩 필요할 때 해주고, 나머지는 내가 다 한다. 빨래부터 분리배출, 수족관 물 주기, 화초 관리, 청소, 로봇 청소기가 있었는데 지금 고장이 나서 청소기로 왔다 갔다 하고. 어떨 때는 아침에 집안일 한 2시간 하고 나오고.
집사람이 생각할 때 아, 이 사람은 이혼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같이 사는 게 좀 이득이겠다, 그런 마음을 심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좋은 결혼 생활을 보여주지 못해 미안하다
Q. 아이들 얘기해 보자.
애들에게 가장 황금 시기는 부모가 귀엽게 살피고 아빠가 많이 필요한 어린 시기인데, 그때 나는 백화점에서 일했기 때문에 그런 시기를 많이 놓쳤다. 애들이 머리가 클 때는 내가 다른 활동을 해서 애들한테 늘 미안한 마음이 있다.
집사람이 기본적으로 불만 같은 게 있고, 애들이 모르는 것 같아도 그걸 알잖아. 그러니까 우리 큰애는 결혼을 안 하겠다고 하고, 우리 둘째는 할 것 같은데, 셋째 아들도 말은 결혼하겠다는데, 결혼 생활이 자기 엄마를 봤을 때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았나 보더라. 반성하고 있고, 우리 애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다.
Q. <아빠하고 나하고> 라이브 방송을 자주 하고 있다. 어떻게 시작했고 꾸준하게 하는 동기가 뭔가?
<아빠하고 나하고> 찍다가 (최근에) 아버지가 아프니까 말을 거의 안 한다. 내가 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나중에 <엄마하고 나하고>를 하게 됐는데 이게 훨씬 더 인기가 있더라.
<엄마하고 나하고>를 요즘에 많이 찍는데, 심할 때는 지인들이 전화 와서 이거 내려라, 할 정도로 너무 적나라하게 막 욕설도 나오고. 어머니가 화나면 물기도 하거든. 때리고 험한 말을 하거든.
내가 워낙 라이브로 영상 찍는 걸 좋아했고, 여러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사실은 이것도 우울증하고 관계있는데, 우울증을 겪으면서 어느 순간 깨달은 게 있다. 내게 트라우마가 있는데,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다. 아버지는 자수성가했고,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아버지를 뛰어넘을 수가 없겠더라고. 돈으로는.
그래서 나는 방향을 다른 걸로 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이제 아버지가 아픈 거야. 내가 우울증 겪었을 때 다짐한 게 있거든.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다, 그런 다짐.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모든 게 마지막으로 보는 거고, 풍경도, 사람하고 대화하는 것도 마지막으로 대화하는 거고. 그러니까 좀 다르게 느껴지는 거야.
그리고 다음 날 눈을 뜨면 감사한 마음으로 일어나고, 하루하루를 사는 거다. 그러다 보니 영상을 남기는 게 되게 중요하다는 걸 어떤 순간 느꼈다. 페이스북 라이브가 찍기 되게 쉽거든. 영상에 대한 욕심도 생겨나기 시작했고, 지금 사진도 배우고 있다.
사진을 배운다. 사진에 사람과 이야기를 담고 싶다
Q. 사진을 배운다고?
박태진 선생에게 지금 배우고 있다. ‘수요사진산책’이라고, 학교로 치면 3학기째다. 봄 학기 중인데, 가을 학기 또 할 거고. 학기마다 졸업 전시회를 한다. 한 학기만 하고 그만두는 사람도 있으니까. 이번에 세 번째 학기가 다 돼 가거든.
사진을 배우니까 좋은 게 많다. 소풍 나가듯이 3시간 정도 마음대로 사진을 찍고, 한 5장 골라서 서로 이야기하고, 선생이 설명해 주니까 너무 좋은 거야. 출사 나가는 일도 소풍 같은 느낌이 들고. 나에게 선물 주는 것 같고 너무 좋더라고. 주변에 많은 사람이 같이하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Q. 어떤 걸 찍나?
나는 기본적으로 풍경 사진은 별로 끌리지 않더라. 잘 찍는 기술은 내가 약한 데다 흥미도 없다. 너무 잘 찍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으니까. 내 사진에는 사람이 들어가고 이야기가 들어간다.
의도치 않았는데, 선생이 내 사진이 재미있다고 하더라. 유머가 있다, 그런 식으로 표현하더라고. 내 사진에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곤충이나 이런 게 항상 있다.
내가 죽은 후에도 내 아들이 나와 대화할 수 있게 매일 글을 쓴다
Q. 환갑까지 몇 년 남았나? 환갑을 대비하는 자세와 이후의 인생을 들려 달라.
내가 나이를 지금은 잊어버리고 사는데, 윤석열 정부 나이로는 한 5년 남았고, 옛날 나이로 치면 3년인데, 진갑으로 보통 하더라고. 그러니까 4년 정도 남은 거다.
나는 어릴 때 만화책을 많이 봤다. 어릴 때 공상 같은 것도 많이 하고, 지금도 내 미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하는데, 내가 페이스북에 늘 글을 많이 쓴다. 많이 남기는 게 어떨 땐 유서라고 생각하기도 하거든. 내 마지막 글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 글들을 다 모으고 AI가 나중에 정리를 해줄 거니까, 누가 정리를 안 해줘도. 나중에 그걸 다 합쳐 놓으면 내가 나중에 인공지능화되어서 또 하나의 박창홍이라는 사람, 그 인공지능이 우리 아들하고 대화할 수도 있고. 많이 남겨놓으면 (지금의 나와 인공지능인 내가) 더 가까운 (모습일) 거 아닌가. 미래에는 그런 형태로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3년 후든, 10년 후든, 내 아버지를 생각하면 내가 건강하다고 할 때 25년 정도, 아주 건강하면 80대 중반까지 활동한다고 볼 때 한 25년 정도 남았는데, 그때까지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살려고 한다.
내 꿈은, 내 부모님 떠나면 오토바이 사서 (실컷 타다가) 오토바이 사고로 죽는 거다.
내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
이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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