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비상계엄 사태 이후 많은 시민이 피로에 시달리고 있다. 언제 나올지 모를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리며 마음은 지쳐가고, 거리로 계속 나가는 몸도 피곤하다. 그 와중에 무서운 기세로 경북 동북부 지역을 태운 산불은 시민들의 속까지 검게 태웠다. 사회재난과 자연재난을 함께 겪고 있는 한국 사회는 위태롭다.
나라 밖의 상황도 만만치 않다. 트럼프의 등장으로 국제정치와 경제 모두 뒤흔들리고 있는데, 우리는 협상의 파트너조차 정하지 못했다. 경색된 남북한 관계 역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갑작스러운 혐중 정서가 한·중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예측하기 어렵다. 이렇게 나라 안팎에서 위험신호가 강해지고 있는데 실마리를 찾아야 할 정치는 정쟁의 늪에 빠진 느낌이다.
재난과 엘리트 패닉
리베카 솔닛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라는 책에서 재난이 그 사회의 건강함과 정의로움, 회복력의 정도를 드러낸다고 본다. 일시적이나마 재난은 피해자들을 개인적인 삶에서 공적이고 집단적인 삶으로 인도하는 사건이고, 시민들이 부족한 자원을 서로 나누고 도우며 공동체적인 삶을 회복하는 시간을 만든다. 그래서 솔닛은 “재난은 지옥을 관통해 도달하는 낙원”이라 말한다.
물론 이것은 함께 재난을 겪는 구성원들이 적극적으로 공동체를 재건하려 할 때의 이야기다. 그러지 않을 경우 약탈과 폭력이 발생하기 쉬운데, 특히 공포와 영웅심에 사로잡힌 엘리트들이 낯선 타자를 폭력으로 밀어내며 재난을 비극으로 몰고간다. 솔닛은 이를 ‘엘리트 패닉’이라 이름 붙이고 그 요소를 “사회적 무질서에 대한 두려움, 빈민과 소수자와 이민자에 대한 두려움, 약탈과 경제범죄에 대한 강박관념, 치명적인 무력에 기대려는 마음, 헛소문에 기초한 행동”이라 정의한다. 재난을 심화시키고 재난의 복구도 지연시키는 위험한 인물들은 힘을 가진 엘리트들이다.
한국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재난을 겪으며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공동체를 회복하려는 시민들이 여기저기에서 등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비상계엄 사태 이후 군대와 경찰, 중앙정부의 태도를 보면 이전과 달라진 변화를 찾아볼 수 없다. 국회의 국정조사 과정에서 알려지는 당위적인 답변을 제외하면 군대의 민주적인 변화는 체감할 수 없다. 계엄에 일조했던 경찰 역시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질서를 내세워 자의적으로 물리력을 행사하고 있다. 비상계엄, 제주항공 참사, 경북지역 등의 산불 같은 사건을 겪으면서도 중앙 행정부처들은 여전히 일방적으로 정책 결정을 내리고 사업을 강행하고 있다.
확산되는 패닉 막아야
이런 상황에서 더 큰 재난과 혼란이 닥쳐오면 한국의 엘리트들이 패닉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민주적인 통제를 받지 않는 정부조직의 엘리트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공동체의 건강함과 정의로움을 회복하는 방향보다 패닉으로 발전하기 쉽다. 질서와 사유재산 보호를 내세워 소수자나 약자를 억압하고 정확하지 않은 정보에 기대어 공권력을 남용할 경우 공동체로의 회복은 어려워지고 혼란은 폭력으로 이어질 것이다.
난감한 점은 엘리트들의 패닉이 대중에게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편을 나눠 상대를 비난하고 부정확한 정보에 기대어 정치적인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적대시한다. 이런 과잉반응은 대통령 탄핵 같은 정치적인 사안만이 아니라 산불 같은 자연재난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확산되는 패닉을 막을 방법은 있을까? 피로에 지치다 보니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조급함이 생긴다. 그래서 자꾸 문제를 단순화시키고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시킨다. 윤석열만 없어지면, 특정한 사람이나 조직이 사라지면 문제가 해결되리라 여기고,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악마나 조롱거리로 만든다. 폭력과 대항폭력의 악순환을 부르기 쉬운 이런 태도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패닉의 대중적인 전파를 막으려면 패닉에 빠진 엘리트들부터 통제해야 한다. 엘리트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며 공권력을 민주적으로 통제할 방법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재난에 대한 책임을 엘리트들에게 묻고 구체적인 개선안을 찾아야 한다. 여기에는 개헌처럼 큰 이야기도 필요하지만 공동체를 회복하려는 시민들이 민주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다양한 장치들에 관한 논의도 필요하다. 우리는 이 폐허를 매섭게 노려보며 하나씩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