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뒤진 분야 따라잡을 ‘다이내믹 캐치업’ 다시 필요

2025-04-13

후발국 성장 전략 ‘캐치업 경제학’ 다시 보기

한국의 경제 기적을 ‘압축 성장’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다. 국내외 유명 학자들이 이 용어를 사용했고 정책 담당자와 언론인, 기업인도 그대로 반복하다 보니 수십 년에 걸쳐 고착됐다. 그러나 필자는 이 용어가 ‘캐치업(Catch-up·따라잡기)’의 핵심을 잘못 짚어서 첫째 한국의 경제 발전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많이 만들어냈고, 둘째 한국을 캐치업하려는 경쟁자에 안이하게 대처하게 했고, 셋째 한국이 지금 다른 나라에 뒤떨어지는 부분에서 캐치업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캐치업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개발도상국이었을 때보다, 아래로부터의 추격에 대응하며 위로 추격을 해야 하는 지금의 샌드위치 상황에 더 쓸모있는 일인 것 같다.

캐치업은 모방 아닌 창조적 과정

신기술 적용, 대체재 만들며 성공

미국 제치고 반도체 장악한 한·일

D램 집중하고 품질 경쟁력 높여

중국에 뒤처진 전기차·태양광 등

정부와 기업 힘 모아 추격 나서야

캐치업 핵심은 ‘압축’ 아닌 ‘다른’ 전략

‘압축’이라는 말은 선진국이 발전한 길이 있는데, 후발국이 그 길을 빨리 따라갔다는 뜻이 있다. 이 개념에서는 ‘더 빨리’가 핵심이다. “빨리빨리 하다 보니 산업화의 ‘필수 전제조건들(prerequisites)’을 건너뛰고 외형에 치중한 성장을 해서 많은 부작용이 일어났고, 따라서 ‘정상화’ 하기 위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생겨났다. 국내에서 존경받는 고(故) 조순 교수가 일찍부터 이런 압축성장론을 펼쳤다. ‘요소 투입’에만 의존한 성장이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에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가 발생했다는 폴 크루그먼 당시 MIT 교수도 비슷한 입장이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보면 캐치업의 요체는 ‘빨리’보다 ‘다르게’에 있다. ‘다르게’의 원리를 가장 먼저 체계적으로 설명한 사람이 유럽의 19세기 후발 산업화를 연구한 경제사학자 알렉산더 거셴크론 하버드대 교수다. 그는 무역과 농업 부문에서 부를 축적한 자본가들이 자율적으로 산업혁명을 주도했던 영국과 달리, 19세기 중반 뒤늦게 뛰어든 독일에서는 종합은행(universal banks)이 산업화를 주도했고, 19세기 후반에 더 늦게 참여한 러시아에서는 정부가 강제로 자본을 동원해 산업화를 이뤄낸 차이점에 주목했다.

전략도 달랐다. 영국이 경공업에서 시작해 중공업으로 진화했던 것과 달리 독일은 중공업에 집중했다. 기술 진보가 빠른 부문에 집중하는 불균형 성장이다. 그리고 신기술을 공격적으로 채택했다. 철강에서 베세머 방식은 용광로를 대폭 크게 해 ‘규모의 경제’를 통해 생산 단가를 낮출 수 있지만, 아직 현장에서 검증되지 않은 기술이었다. 구기술로 돈을 잘 벌고 있던 영국 철강사들은 위험을 부담하며 신기술에 뛰어들 유인이 없었다. 하지만 후발 주자인 독일은 그 위험을 감수하고 신기술을 적용해서 발전시켰다. 공장 규모를 크게 키워야 하므로 자본 조달 부담이 컸지만 종합은행이 선도해서 ‘더 크게, 더 크게(bigger and bigger)’ 전략을 수행했다.

독일의 선택은 영국의 길을 압축한 것이 전혀 아니다. 더 빨리 갈 수 있는 다른 길을 택한 것이다. 만약 영국과 같은 길을 빨리만 가려 했다면 전체적인 자금과 기술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영국 업체와 경쟁을 이겨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부족한 자원을 경쟁에서 이길 가능성이 큰 곳에 집중했고, 그 부문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나름대로 찾아낸 것이다. 선행 자본 축적이나 자본가 계급 형성이라는 영국식 ‘필수 전제 조건’이 별로 형성되지 않았어도 ‘대체재’를 만들어내며 캐치업했다. 흔히 후발 주자가 ‘모방’을 통해 성장한다지만 거셴크론은 캐치업의 핵심이 후발 주자가 주어진 상황에 맞춰 전략과 제도를 창조적으로 만들어내는 데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필자는 거셴크론의 혜안을 20세기 후반 반도체 산업에서 적용해 ‘다이내믹 캐치업 전략(dynamic catch-up strategy)’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일본은 기술이 상대적으로 단순한 가전에서는 미국을 금세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라섰지만 반도체와 컴퓨터에서는 어려움을 겪었다. 기술 진보가 워낙 빠르고 3~4년마다 제품의 세대교체가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노력해서 거의 따라잡았다 싶으면 미국이 차세대 반도체를 내놓으면서 앞서 나가고 일본이 다시 뒤떨어지는 상황을 몇 차례 겪은 뒤 일본은 1970년대 중반에 새로운 전략을 채택했다.

미국 반도체 산업 추격한 일본의 전략

그 핵심은 불균형 성장, 현세대와 차세대 기술 동시 캐치업, 가격 및 품질 경쟁력 확보다. 첫째, 후발 주자로서 전반적인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반도체 전 부문을 쫓아가기보다 일본 입장에서 가능성이 큰 D램에 역량을 집중했다. D램이 반도체 중 가장 자본 집약적인 부문이기 때문에 일본이 가전에서 쌓은 대량 생산 역량을 활용하기 쉽고, 디자인이 상대적으로 덜 복잡해 기술을 따라잡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비즈니스 그룹 케이레츠(系列)가 독일의 종합은행처럼 도전적인 자본 동원을 뒷받침해줬다.

둘째, 미국이 차세대 제품을 내놓으면서 계속 앞서 나간 탓에 캐치업에 실패했던 만큼 그런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당시 최첨단인 16K D램과 차세대 제품인 64K D램을 거의 동시에 쫓아가 미국이 64K D램을 내놓을 때 일본이 64K D램을 함께 내놓는 야심적 목표를 세웠다. 두 세대에 걸쳐 한꺼번에 투자해야 하므로 자본도 과거보다 훨씬 많이 동원해야 하고 개발할 기술도 많았지만 이것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셋째, 두 세대에 걸친 대규모 투자를 했는데 일본이 내놓은 64K D램이 시장에서 팔리지 않으면 낭패이기 때문에 제품 가격 및 품질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공정을 개선하고 디자인을 단순화했다. 또 독일의 철강 캐치업처럼 신기술을 공격적으로 채택했다. 당시는 웨이퍼 크기가 3인치에서 5인치로 넘어가던 상황이었다. 미국 업체는 기존의 3인치 제품으로 돈을 잘 벌고 있었기 때문에 5인치로 빨리 전환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5인치는 쉽게 부서지고 넘어야 할 기술 과제가 많았지만 성공만 하면 단위 웨이퍼당 반도체 개수를 크게 늘려 생산 단가를 낮출 수 있었다. 일본은 이 위험에 도전해서 5인치 웨이퍼 공정을 성공적으로 구축해냈다.

창조적 캐치업 폄하하는 압축 성장론

그 결과 1980년대 초반 메모리 반도체의 주도권은 일본으로 넘어갔다. 1970년대 중반의 주력품 4K D램에서는 세계 시장 점유율이 미국 83%, 일본 17%였으나, 1982년의 주력품 64K D램에서는 일본 71%, 미국 29%로 대역전됐다. 10년가량이 지난 뒤 한국의 삼성전자는 4M D램과 16M D램에서 비슷한 다이내믹 캐치업 전략을 보다 공격적으로 수행했다. 웨이퍼 크기가 6인치에서 8인치로 넘어가는 흐름에서 8인치 투자를 가장 먼저 했다. 일본이 넘볼 수 없는 ‘램프업(ramp-up),’ 즉 제품 개발 이후 대량 생산으로 빨리 넘어가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 결과 삼성은 1993년 메모리 반도체 세계 1등으로 올라섰고, 그 위치를 지금까지 30여년간 유지하고 있다.

압축 성장이라는 말은 이렇게 창조적인 캐치업 과정을 폄하한다. 크루그먼은 동아시아의 용이 ‘땀 흘리기(perspiration)’만으로 성공했지 ‘영감(inspiration)’이 없었다고 모욕적 발언까지 했다. 국내에서도 외환위기 이후 국제통화기금(IMF) 체제를 거치면서 혁신 없이 외형 성장에만 치중한 결과 나타난 ‘구조적 문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시각이 다수가 됐다. 과거에 우리가 잘 일궈왔던 일들을 창조적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국내 기업이나 제도는 한없이 비판하며 ‘베스트 프랙티스’나 ‘글로벌 스탠더드’ 등 외부에서 창조 동력을 찾아야 한다는 종속적 선진화 논의가 주류가 됐다.

현재ㆍ차세대 제품 동시 추격 전략 필요

더 심각한 문제는 중국과 같이 한국을 뒤늦게 캐치업하려는 나라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우리가 창조적으로 이룬 것조차 그게 아니라고 치부하는 탓에 중국이 창조적으로 캐치업하리라는 걸 제대로 계산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중국은 창조력을 발휘해서 우리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캐치업을 일궜다. 전기차와 드론·태양광 등 여러 분야에서 이미 세계 1위로 올라섰고 격차를 더 벌리고 있다.

미·중 분쟁 속에서 샌드위치가 돼 있는 한국은 지금 심기일전해서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 후발국이 쫓아오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들이 창조적으로 빠른 길을 만들어내려 노력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효과적인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중국에 뒤떨어진 부분에 대해서는 겸허하게 인정하고 새로운 다이내믹 캐치업 전략을 세워야 한다. 원칙은 비슷하다. 가능성이 있는 부문에 집중해야 한다.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뒤처진 것만 아니라 앞으로 더 발전해 갈 것까지 동시에 추격해야 한다. 추격한 뒤 원가와 품질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도록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 전략은 적극적인 투자와 빠른 집행을 요구한다. 정부에서 이를 뒷받침해준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기업 스스로 방책을 찾아야 한다. 기술 추격을 위해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실리콘 밸리에 인력을 보내고 합작을 추진했던 것처럼 중국에 뛰어들어 역량을 배우고 활용해야 한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 미국 등 선진국에 대한 창조적 캐치업도 물론 지속해야 한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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