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두 번 넘는 100km 산악 달리기, 고통은 희열이 된다[스튜디오486]

2025-10-24

[스튜디오486]은 중앙일보 사진부 기자들이 발로 뛰어 만든 포토스토리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중앙일보는 상암산로 48-6에 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한라산을 두 번 오르는 달리기대회가 있다. ‘2025 트랜스제주 국제트레일러닝대회’. 이 대회는 트레일러너라면 누구나 한번쯤 참가를 꿈꾸는, 프랑스 샤모니에서 8월 말에 개최되는 UTMB(Ultra Trail du Mont Blanc) 파이널 대회의 참가 자격을 부여하는 전 세계 50개 UTMB 월드시리즈 대회 중 하나다. 올해 대회에는 세계 44개국에서 온 외국인 참가자 1800여 명을 포함한 총 4900여명이 참가했다. 지난해 대회보다 참가자가 900명 가량 늘었다. 지난 18일 이 대회 100㎞ 부문에 직접 출전했다.

출발지인 서귀포 제주월드컵경기장에 출발 30분 전인 오전 4시 30분에 도착했다. 드롭백(레이스 중간에 교체할 여벌옷 등을 담은 개인물품 가방)을 맡기고 출발선으로 이동. 그런데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아뿔싸, 숙소에 배번을 두고 왔다. 다행히 숙소는 차로 10분 거리. 헐레벌떡 배번을 챙겨 출발 5분 전에 간신히 스타트라인에 섰다. 덕분에(?) 그동안 함께 훈련을 해온 '저스트레일', '남달러(남산을 달리는 러너)' 동료들과 '단사(단체사진)'도 찍지 못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선수들은 모두 휴대폰을 들어 이 순간을 기록했다. 꽤 늦게 스타트라인에 합류해 최후미일 거라 생각 했는데 내 뒤로도 선수들이 많았다. 이번 트랜스제주 대회는 150㎞, 100㎞, 70㎞, 20㎞ 등 총 4개 부문의 경기가 치러진다. 기자가 참가한 100㎞ 부문은 800여 명의 선수가 함께 뛴다. 제한 시간은 29시간. 18일 오전 5시에 출발해 다음 날인 19일 오전 9시까지 피니시라인에 도착해야 완주가 인정된다. 이번 경기에 도전하면서 기자는 경기 내내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걷지 않고 꾸준히 뛰는 것을 개인적인 목표로 삼았다. 물론 완주도 포함된다. 지난달 서울에서 열린 100㎞ 트레일러닝대회에서는 초반에 무리했다가 중반부터 허벅지에 쥐가 나는 바람에 후반에는 '걷뛰(걷고 뛰기)'로 완주했던 쓰라린 경험 때문이다.

100㎞ 코스는 한라산을 두 번 오른다. 제주월드컵경기장을 출발 → 영실 탐방로 → 윗세오름(1700m) → 어리목 하산 → 관음사 탐방로 → 백록담(1950m) → 성판악 → 이승이오름 → 한라산 둘레길(수악길)을 돌아 제주월드컵경기장으로 골인한다. 코스 상 약 50㎞ 지점인 백록담까지만 가면 후반부는 고도표상으로 큰 오르막이 없는 평탄한 길(?)이다. 물론 이건 기자의 커다란 착각이었다.

초반 약 3㎞는 일반도로를 달린다. 한라산으로 향하는 오르막을 천천히 오른다. 최대한 무리하지 않기 위해 가볍게 달린다. 숲길에 들어서는 앞선 선수의 다리만 보며 달린다. 종아리 근육이 잘 발달돼 있다. 한참을 뒤에서 달리다 어느 순간 추월을 하며 힐끔 돌아보니 여성 선수였다. 중반 이후에 나를 추월해 앞서갔고 이후 다시 보지 못했다. 약 20㎞ 지점인 영실 탐방로 입구에서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중산간으로 들어서자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안개까지 자욱해 2~3m 앞이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계단과 데크길을 달려 해발 1700m 윗세오름에 도착했다.

두 번째 한라산 오르막이 시작되는 관음사 탐방로 입구까지 긴 내리막이 이어진다. 계단과 돌길이 섞인 길을 조심스레 뛰어 내려온다. 비가 내린 탓에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부상을 입고 DNF(Do Not Finish:중도 포기)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더구나 제주도에는 이끼 낀 돌이 많아 더욱 조심해야 한다. 그 사이 빗줄기는 더 거세졌다.

누적 약 40㎞ 지점의 관음사 체크포인트에 도착하니 필수장비 검사를 한다. 산악 지형을 달리는 트레일러닝 대회는 갑작스러운 부상이나 고립에 대비해 필수장비를 지정하고, 필수장비가 미비된 경우 시간을 추가하는 벌칙을 주거나, 실격처리를 하는 등 엄격한 규정을 적용한다. 필수장비 검사를 마치고 출발지에서 맡긴 드롭백을 찾아 비와 땀에 젖은 옷과 양말을 새것으로 교체했다. 혹시 몰라 드롭백에 넣어두었던 신발은 발 상태가 나쁘지 않아 갈아신지 않았다. 이제 두 번째 한라산을 올라야 한다. 다음 보급지인 성판악까지 거리가 거의 20㎞에 육박하므로 여기서 최대한 보급을 해야 한다. 사발면과 삼각김밥으로 배를 충분히 채우고 백록담을 향해 출발했다.

백록담으로 향하는 관음사 탐방로는 현재 일반 탐방객들의 출입이 금지된 상태다. 이번 대회를 위해 특별히 선수들에게만 길을 열어주었다. 성판악 탐방로에 비해 거리는 짧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경사가 가팔라졌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꾹꾹 눌러 밟아 오르다보니 어느덧 정상에 다다랐다. 이번 대회 코스 중 가장 높은 곳이다. 하지만 백록담은 볼 수가 없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안개만 자욱했다. 아쉬운대로 정상석에서 기념촬영을 마친 뒤 내리막길에 진입했다. 아직 다리가 멀쩡해 안도했다. 후반부도 잘 달릴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됐다. 다음 체크포인트인 성판악까지 10㎞ 가까운 내리막이 이어진다. 내리막에선 허벅지 앞쪽 근육에 부하가 많이 걸리는데, 내리막 중반 이후부터 허벅지 통증이 심해져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오르막에서 추월했던 선수들이 내리막에서 기자를 다시 추월해 갔다. 하지만 추월하는 선수를 뒤쫓지 않았다. 그랬다간 더욱 몸에 무리가 오고 이후 시간은 악몽으로 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오로지 나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아직도 40㎞ 이상의 길이 남았다.

한라산 둘레길(수악길)에 접어들자 코스를 고도표로만 분석한 기자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평탄할거라 생각했던 길은 뛸 수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크기의 돌멩이로 가득했다. '길'보다 '돌무더기'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삼다도라 제주에는 돌이 많았다! 오죽하면 ‘제주는 돌이 돌을 낳는다’는 비유까지 생겨났을까. 돌을 잘못 밟아 발목이 여러 차례 돌아가고, 돌부리에 발가락도 여러 차례 부딪혔다. 완주한 후 양말을 벗으니 검게 변한 왼발 검지 발톱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헤드 랜턴 불빛에 의존해 달리기 시작했다. 사위가 어두워지자 돌길의 난이도는 두 배가 됐다. 대회 후반부에 접어들자 내리막 구간이 많아진다. 허벅지 앞쪽의 피로도가 올라와 오르막에서 5명을 추월하면 내리막에서 8명에 추월당하는 식의 패턴이 반복된다. 마음이 조급해지며 멘털이 털리려 한다. 다시 한 번 다짐한다, '이건 누구도 아닌 나의 레이스다. 나만의 페이스로 달리자'. 코스 막판 고근산(393.7m)에 오르니 환하게 불을 밝힌 제주월드컵경기장이 눈에 들어온다. ‘다 왔구나’ 생각하며 시계를 보니 아직도 5㎞를 더 가야한다. 이때부터 또 다른 지옥도가 펼쳐졌다. 경기장 부근을 빙글빙글 돌며 다리 밑 하천 돌길을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 ‘다 왔다’는 생각 때문인지 거리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더디지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끝이 보였다. 하천 길을 벗어나 도로를 만나 고개 하나를 넘어가자 저 멀리 제주월드컵경기장이 보였다. 경기장 외곽 트랙에 올라서자 많은 사람이 ‘고생했다!’, ‘멋지다!’ 환영해준다. 이 순간만큼은 내가 그들의 가족이고 친구가 된 느낌이다. 결승점 부근에 늘어선 사람들과 하이파이브를 한다. 결승점을 통과하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웃으며 골인하고자 했던 이번 경기의 목표가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103.15㎞

16시간 28분 57초

전체 43위

연령대(50~54세) 2위

이번 대회에서 기자가 거둔 성적이다.

대회 완주로 프랑스 샤모니에서 열리는 UTMB 파이널 신청 자격이 주어지는 스톤 3개를 얻었다. 3개의 스톤으로는 당첨이 어렵겠지만, 내년 트랜스제주 150㎞에 출전해 스톤 4개를 더 확보한 뒤 도전해 볼 생각이다.

고통 속에 달리는 내내 ‘다시는 출전하지 않겠다’던 생각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옅어졌다. 지금은 길 위에서 만난 제주의 바람과 풍경, 열렬히 응원해주던 대회 스태프들, 결승점을 통과할 때의 희열만이 진하게 마음속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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