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청년일보 】 금융사들이 퇴직연금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퇴직연금 가입자들이 예상치 못한 손실을 볼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1일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 등에 따르면 퇴직연금 사업자(은행, 보험사, 증권사 등 금융사)는 퇴직연금 적립금 유치를 위해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경쟁은 새로운 고객 확보라는 건전한 방향보다는, 이미 다른 금융사에 가입한 고객을 빼앗는 '제로섬 게임'으로 변질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분석이다.
금융사간의 경쟁 심화는 금융사들의 수수료 수익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재 퇴직연금 사업자들은 운용 수익률과 무관하게 적립금 규모에 따라 수수료를 받는다. 이에 금융사 입장에서는 신규 가입자를 유치하는 것보다 이미 상당한 규모의 적립금을 보유한 타사 고객을 유인하는 것이 단기적으로 훨씬 유리하다.
게다가 신규 가입자는 적립금이 상대적으로 적고, 사업장별 제도 운용 방식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등 금융사 입장에서 번거로운 측면이 있어 기존 고객 확보에 더욱 열을 올리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실제로 최근 5년간 퇴직연금 도입률은 2019년 27.5%에서 2023년 26.4%로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이는 금융사들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보다 기존 고객 쟁탈에 집중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에 신규 가입 실적 대비 과도하게 높은 타사 이전 실적을 보이는 사업자에 대한 감독 강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금융사간의 과도한 경쟁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퇴직연금 가입자인 근로자다.
사업주는 대출 등 간접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확정기여형(DC형) 가입 근로자는 계약 이전 시 적용되는 '중도 해지 이율'이라는 예상치 못한 함정에 빠져 손실을 볼 수 있다. 계약 이전 시 사업주의 동의 절차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퇴직연금 사업자 선정은 사업주가 주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퇴직연금 가입자는 안정적인 노후를 위해 원리금 보장 상품을 선택한다. 만기 또는 퇴직 시 해지할 경우에는 약속된 금리를 받을 수 있지만, 금융사 간 계약 이전은 '중도 해지'로 간주돼 당초 약속된 금리보다 훨씬 낮은 '중도 해지 이율'이 적용된다.
심한 경우 원래 금리의 50∼90% 수준에 그쳐, 높은 금리를 기대했던 가입자에게는 큰 손실로 돌아올 수 있다. 예컨대 가입 시 연 5%의 금리를 약속받았더라도, 계약 이전 시에는 연 2.5∼4.5% 수준의 금리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최근 도입된 디폴트옵션 상품 역시 계약 이전 시 기존 투자 기간에 대해 낮은 금리가 적용될 뿐만 아니라 새롭게 가입하는 금융기관의 원리금 보장 상품 금리마저 기존보다 낮아 이중으로 손해를 볼 가능성이 있다. 디폴트옵션의 원리금 보장 상품은 대부분 3년 만기 상품으로 만기가 긴 편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디폴트옵션 제도가 도입된 2023년에는 원리금 보장 상품 금리가 4%대 중후반이었으나, 올해는 2%대 후반에 불과하다.
따라서 계약 이전에 따라 기존 원리금 보장 상품을 해지하고 올해 3월에 다른 원리금 보장 상품에 새로 가입한다면 상당한 금리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상당수의 근로자가 퇴직연금 계약 이전 시 발생하는 금리 차이와 손실 가능성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거나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금융사의 권유에 쉽게 동의한다는 점이다.
이는 금융사들이 고객의 노후 자산 증식이라는 본래의 목적보다는, 계약 이전을 통한 수수료 수입 확대에만 치중하는 경향을 보여주는 명확한 사례다.
정부는 이런 중도 해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년 10월 31일부터 현물 이전 제도를 시행했지만, 아직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물 이전은 기존 상품을 해지하지 않고 그대로 다른 금융기관으로 옮기는 방식이지만, 신탁계약과 보험계약 간 현물 이전은 가능하지 않는 등 모든 상품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퇴직연금 가입자들이 금융기관의 계약 이전 권유에 섣불리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노후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 더욱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계약 이전을 고려한다면 반드시 해당 금융기관에 중도 해지 이율을 문의하고 기존 상품과 이전할 상품의 금리 및 조건을 꼼꼼히 비교 분석해야 한다.
특히 사업장 단위로 계약 이전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노동조합 등 근로자 대표를 통해 집단적인 의사 결정을 하고, 필요하다면 전문가의 조언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아울러 모든 금융상품에 대한 중도 해지 페널티 완화 또는 면제와 같은 제도적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또 금융사들이 계약 이전을 권유할 때 가입자에게 발생할 수 있는 손실을 명확하게 알리고, 중도 해지 시 적용되는 이율과 예상 손실액을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하며, 이를 가입자가 충분히 이해했는지 확인하는 절차가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 청년일보=김두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