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시점 ‘POV’…AI를 뛰어넘는 상상력의 가능성

2025-02-22

“POV: 너는 학교에서 인기가 많은 학생이고, 졸업식 날 네가 좋아하던 아이와 눈이 마주쳤어.” 웹소설 도입부 같은 이 문장과 함께 60초 내외의 쇼트폼 영상이 시작된다. 영상 속 잘생긴 남학생이 아련한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인기가 많았던 적도 없고 잘생긴 남자친구도 없었더라도 어느새 그 영상 속 주인공이 되는 마법에 걸려 60초 동안 내가 주인공인 드라마에 들어간다.

영화나 연극에서 특정 인물의 시점을 강조하기 위한 촬영 기법을 의미하는 POV(Point of View)는 틱톡, 릴스와 같은 쇼트폼 플랫폼에서 인기 있는 콘텐츠 장르다. 영화에서 POV는 특정 인물의 시점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지만, 쇼트폼에서는 시청자가 직접 그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확장된다. 그 덕에 시청자는 주인공의 감정에 공감할 뿐만 아니라, 마치 롤플레이 게임을 하는 것처럼 직접 역할을 수행하는 듯한 몰입감을 느낀다. 주로 ‘네가 이런 상황이라면’이라는 설정 속에서 60초 동안 ‘나’는 새로운 시점으로 세상을 경험한다.

“POV: 너는 악당이고, 지구 멸망이 네 손안에 달려 있어”라는 지문과 함께 긴장감 있는 음악이 흐르고 붉은 경고등이 깜빡이는 버튼 위에 내 손이 올려져 있다. “POV: 넌 연극의 주인공이고 마지막 무대를 앞두고 있어”라는 영상에선, 거울 앞에서 비장한 표정으로 립스틱을 바르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런가 하면 “POV: 시험 전날 네가 공부를 하나도 안 했을 때” “POV: 엄마 아빠가 싸웠는데 거실에서 함께 있어야 할 때”처럼 쉽게 공감이 쉬운 콘텐츠도 인기다. 이 POV 영상에는 좀 신기한 구석이 있다. 그냥 웃다가 넘어가는 일이 대부분이지만 가끔씩 주어진 상황을 멍하니 따르기보다 적극적으로 내 경험과 기억을 재구성하면서 새로운 감정을 체험하곤 한다. ‘이 상황에서 난 어떤 선택을 할까’를 끊임없이 고민하다 보면 내가 몰랐던 감정은 물론, 그 상황에 처했을 다른 이의 감정까지 공감하게 된다.

봉준호 감독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창작자로서 AI가 쓰지 못하는 이야기를 위해 매일 밤 고민한다”고 말했다. AI가 나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일을 하는 시대에, 나만의 독창적인 시점과 관점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계속 나누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쩌면 POV 콘텐츠가 보여준 방식이 답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더 많은 정보’보다 ‘더 흥미로운 해석’에 끌린다. 입체적 시점으로 세계를 감각하는 경험을 틱톡과 릴스 영상 속에서만 해소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진짜 일상에도 더 많은 POV의 순간이 필요하다.

AI가 도달하지 못하는 사고력을 갖기 위해서는 내가 아닌 다른 시점으로 더 많이 세상을 살아봐야 한다. 자신만의 ‘시점’을 갖는 일은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것 이상의 문제. 이는 그저 새로운 정보를 흡수하는 일이 아니라, 상황의 맥락과 뉘앙스를 온몸으로 읽고 해석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복합적 사고 과정이다.

매일 출근길에 지나치던 커다란 나무의 눈으로, 책장에서 수년째 읽히지 않는 책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건 어떨까? 다양한 위치에서, 다른 이의 자리에서 세계를 감각하는 경험이 우리의 시야를 넓혀줄 것이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다양한 ‘POV’를 상상하고 즐기는 귀여운 습관을 지녀보자. 아마도 우리는 더 자주, 더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정유라

2015년부터 빅데이터로 라이프스타일과 트렌드를 분석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넥스트밸류>(공저), <말의 트렌드>(2022)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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