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대통령의 관심사였다면

2025-10-15

해외 취업 박람회 간다고 캄보디아로 떠난 22살 대학생 박모 씨가 출국 3주만인 지난 8월 강제 마약 투약을 비롯한 가혹한 폭행·고문을 당하다 현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비슷한 또래 아들을 둔 엄마 입장에서 사건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한국 정부가 아무 힘 없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엔 이토록 무심할 수 있다는 데 더 놀랐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지난 13일 국감에서 송언석(국민의힘) 의원으로부터 "언제 심각성을 인식했느냐"는 질문을 받고, "지난주 정도, (7월 첫 신고 후) 추가 신고가 없어 대사관에서조차 모르고 한참 시간이 지나간 것"이라고 답했다.

어이가 없다 못해 화가 났다. 캄보디아 내 중국 범죄 조직이 한국 중간책을 끼고 '고수익 알바'를 내세워 사회적·경제적으로 취약한 저학력·저소득 청년들을 유인한 후 감금·고문하며 범죄에 동원한다는 사실은 이미 지난해부터 국내 여러 언론을 통해 숱하게 보도된 바 있다. 심지어 한 언론이 박모씨의 비극적 사망 사건을 "고문흔적"이라는 제목과 함께 처음 보도한 게 벌써 두 달 전인 8월이다. 언론의 숱한 위험 경고에도 정부가 이런 비극을 사전에 막기 위한 그 어떤 실효성 있는 조치도 취하지 않던 와중에 우리 국민이 해외에서 고문당해 죽었는데 주무 부처 장관이 책임을 통감하기는커녕 무려 두 달 가까이 심각하게 여기지조차 않았다니 기가 막힌다.

숱한 언론 경고 무시·부인한 정부

죽음 앞에서도 피해자 탓 면피만

힘없는 국민의 목숨 이토록 가볍나

그런 그가 부랴부랴 뒤늦게 주한 캄보디아 대사를 초치한 건 지난 9일 캄보디아 검찰이 중국인 조직원 3명을 박모씨에 대한 살인·사기 혐의로 정식 기소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관련 보도가 쏟아진 바로 다음 날이었다. 국민 보호에 그토록 굼뜬 외교부가 면피에 있어서만 누구보다 발 빠른 기민함을 보여준 셈이다.

앞서 지난 8월 위의 고문 살해 보도가 나왔을 때도 그랬다. 외교부는 보도 당일 곧바로 보도설명자료를 냈다. "외교부에서 캄보디아 측을 통해 파악한 바에 따르면 동 기사는 사실과 다른 내용을 담고 있으나, 개인정보 및 유가족 보호 차원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기는 어렵다. 유가족 등에게 심적 고통을 줄 수 있으므로 보도에 신중을 기해 달라. " 사망은 사실이지만, 마치 원인은 피해자에게 있을 수도 있다는 뉘앙스였다. 이런 자료 덕분인지 당시엔 후속 보도가 많이 나오진 않았다.

그런데 두 달 뒤인 지난 9일, 캄보디아 검찰의 살해 용의자 기소를 계기로 국민 안전을 소홀히 한 외교부를 질타하는 관련 보도가 쏟아지고 이재명 대통령까지 뒤늦게 "총력 대응"을 지시하자 외교부는 또 보도설명자료를 냈다. "9일 다수 언론이 우리 국민 사망을 보도했는데, 이는 이미 국내 언론이 보도한 사망 사건과 같은 사안…필요시 신속한 구출과 안전한 귀국을 위해 필요한 영사 조력을 적극 제공하고 있다. (또 다른 감금 피해자가) 쓰레기 더미에 숨어있었다는 주장은 CCTV 확인 결과 사실과 다르며 순수한 취업 사기 피해자 외에 (범죄에) 자발적 가담 사례가 많다. " 책임있는 정부 당국자로서 마땅히 표할 법한 죽음에 대한 일말의 안타까움이나 반성, 사태 해결을 위한 의지는 찾아보기 어려운 대신 피해자를 탓하는 전형적인 책임 회피만 빼곡하다.

처음 이걸 보고는 참 기이하다 싶었다. 그런데 조 장관의 국감 발언 뒤에야 우리 정부가 자의적으로 국민 목숨값을 달리 매기곤 어떤 죽음엔 아예 그 값어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냐는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됐다. 조 장관이 그토록 무심할 수 있었던 건 캄보디아 피해자들 대부분 권력에 기댈 수 없는 우리 사회 소외층, 특히 책임을 전가하기 용이한 범죄 피의자였기 때문이었나. 그리고 무엇보다 산업현장에서 벌어지는 중대재해 사망 사건처럼 대통령의 주된 정치적 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나 싶기도 하다. 아무리 힘 없고 잘못된 선택을 했어도 국가라면 이렇게 외면해서는 안 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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