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원 암호명 ‘A~S’…한·미 정보전에 목숨건 재미한인 19명

2025-03-28

[제3전선, 정보전쟁] 대한독립 정보전 〈하〉 - 냅코작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은 ‘암호명 A’의 비밀 정보요원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정보당국이 재미 한인들과 함께 추진한 ‘냅코작전(NAPKO Project)’ 요원이었다. 1993년 미 중앙정보국(CIA)이 2차 대전 비밀문서를 해제하면서 밝혀졌다. CIA 전신인 전략사무국(OSS)이 기획한 이 작전 속으로 들어가 보면 유일한을 비롯해 한국 요원 19명의 목숨을 건 독립정보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냅코작전도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잉태됐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등 재미 한인들은 미국을 위해 싸울 수 있도록 전쟁 참여를 간청했다. 한인들의 미국 내 위상은 물론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42년 첫번째 작전은 비밀 누설로 취소

이에 OSS는 당시 미국에서 사업하던 유일한의 자문을 얻어 한인들의 전쟁 참여 타당성·능력 등을 검토했다. 그러나 검토 결과 나라 없는 한인들의 전쟁 참여 효과는 미미했다. 오히려 정보전을 펼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판단이 나왔다.

그래서 1942년 11월 OSS는 재미 한인들과 극비리에 비밀 정보전을 추진했다. 그런데 실행하기도 전에 비밀이 노출돼 버렸다. 같은해 12월 10일 LA주간지 뉴코리아에 “한인 7명이 특수정보훈련을 받고 워싱턴으로 갔다”는 기사가 났다. 당황한 OSS는 스파이교육까지 마친 한인들을 일반 군인으로 전환하는 등 작전 자체를 취소해 버렸다. OSS조사 결과 이승만에게 한인 요원 선발을 위임했는데 이 과정에서 비밀이 누설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합동정보전 추진은 2차 대전 말인 1944년 다시 본격화됐다. 마지막 저항세력인 일본 제압을 위해 일본과 가장 가까운 한국과의 합동정보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대일 특수정보전의 대가로 알려진 OSS의 칼 아이플러(Carl Eifler) 대령에게 맡겼다. 철저한 비밀유지를 위해서다. 아이플러는 우선 버마 전선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한 한국인 OSS요원 장석윤을 워싱턴으로 불러 구체적인 작전 계획 수립을 지시했다. 장석윤은 1942년 검토해 놓은 OSS의 합동정보전 계획안을 토대로 새로운 안을 마련했다. 이를 냅코작전이라 불렀다. 2년 전 계획보다 확대된 것으로 한국과 일본에 잠입해 정보수집은 물론 지하조직 구축, 파괴공작, 무장 저항운동까지 전개하는 것으로 설계했다. 1944년 7월 17일 OSS가 이를 승인하면서 드디어 작전이 본격화됐다.

아이플러와 장석윤은 요원부터 물색했다. 영어·일본어가 뛰어나고 독립정신이 투철하며 실전에 바로 투입할 수 있는 자들을 중심으로 물색했다. 이 조건을 갖춘 첫 대상자들은 미군내 한인들이었다. 그래서 OSS의 장석윤과 박기벽·최창수·하문덕, 미 전쟁부의 변일서·이태모, 미 육군의 이초와 차진주가 차출됐다.

재미 한인사회에서는 이 작전 수립 때부터 자문해 온 유일한을 비롯해 김강·변준호·이근성·최진하가 선발됐다. 모두 미국 대학을 졸업한 인재들이었다. 일본군을 탈출한 학도병 박순동·박형무·이종실도 선발됐다. 목숨을 건 탈출 결기와 반일 독립 의지가 높이 평가됐다.

아이플러는 한발 더 나아가 국제적으로 금지된 전쟁포로 중에서도 물색했다. 사이판·괌 등에서 전쟁포로가 된 한인들이 위스콘신주 맥코이 포로수용소에 많이 있다며 장석윤에게 은밀히 물색을 지시했다. 이에 장석윤은 1944년 11월 자신을 필리핀에서 잡힌 포로라고 위장해 수용소에 잠입했다. 거기서 황해도 출신 노무자 김필영·김현일·이종흥을 빼내 왔다.

동시에 FBI는 이들에 대한 신원조사도 철저히 했다. 당시 한인들은 미국의 적성국인 일본 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을 배반하거나 이중 스파이가 될 가능성이 있어서다.

신원조사까지 통과한 한인 요원 19명은 평균 34세로 특수훈련을 받기가 다소 무리일 정도였다.(20대 3명, 30대 8명, 40대 6명, 50대 2명) 13명은 가정도 있었다. 유일한은 “필요하면 자신의 미국 회사를 정보활동에 활용해도 좋다”고 동의했다. 모두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목숨을 건 결기와 희생정신이 이 모든 것을 극복하게 했다. 이어 혹독한 훈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외부와 차단된 LA인근의 산타카타리나 섬으로 보내진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일체의 사실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는다는 비밀유지 각서부터 썼다. 체포돼 고문을 받더라도 조직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본명 호칭도 금지됐다. 이름 대신 모두 영어 알파벳 A에서부터 S까지 암호로 불렀다. 암호명 A가 유일한이다. 이어 비밀통신·사격·전투 수영 등 기본훈련부터 공중폭파·지뢰설치·낙하산 침투 등 고강도 훈련까지 쉼 없이 실시됐다.

서울침투조·평양침투조 등 팀별 임무 달라

세부 전술훈련은 아이넥팀(Einec), 차로팀(Charo), 무로팀(Mooro), 차모팀(Chamo)으로 나눠 실시됐다. 각 팀별 임무가 조금씩 달라서다. 아이넥팀은 서울 침투조로 조선총독부 등 일제 통치기관에 대한 정보수집과 비밀 지하조직 구축이 주 임무였다. 그래서 서울에 인맥이 많은 유일한 등이 배치됐다. 차로팀은 평양 침투조로 일본에 발각될 위험성이 가장 커 훈련 성적이 뛰어난 요원들로 배치했다. 무로팀은 황해도와 남해 앞바다 작은 섬을 확보해 비밀 작전기지를 구축하는 임무를 받았다. 그래서 황해도와 전남·경남 출신들로 편성했다. 차모팀은 한반도 침투요원들이 안정적인 활동여건을 구축하면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기로 했다.

1945년 8월 5일 모든 훈련이 끝났다. 잠입 일정도 8월 18일로 정해졌다. 요원들은 한국에 잠입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원폭 공격을 받은 일본이 8월 15일 무조건 항복했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냅코요원들은 기뻐할 수만 없었다. 냅코작전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자명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OSS는 8월 15일 작전 중단 명령을 내렸다. 작전 개시를 불과 3일 앞두고서다. 이어 해산명령까지 이어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실감과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더욱 기막힌 것은 맥코이 포로수용소 출신 한인들이 포로수용소로 다시 수감된 것이다. 미국이 포로의 전쟁참여를 금지한 제네바 포로협정 위반을 숨기기 위해서다.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지면 일본과의 포로협상에서 미군 포로들이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우였던 미군이 다시 한인들을 포로수용소에 수감한 것을 본 박순동은 아이플러에게 “왜 조국으로 보내주지 않냐”고 격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아이플러는 “유감스럽지만 여러분을 받아 줄 나라가 없다”고만 답했다. 이 절망적인 기억에 대해 1965년 박순동은 그의 수기 『모멸의 시대』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에게 민족이 있고 산야가 있다. 그러나 우리를 받아 줄 나라가 없어 우리는 국민도 아니고 영토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부평초처럼 버마로 미국으로 떠돌아다녔다.’ 나라 잃은 국민의 절규에 눈시울이 뜨거워져 온다.

이처럼 냅코작전은 2차 대전 당시 OSS와 재미 한인들이 합동으로 전개한 정보전으로, 중국의 광복군과 실시한 독수리작전과 한 쌍이다. 그러나 모두 실행 직전 일본의 항복으로 중단돼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아쉬움은 이뿐만 아니다. 비록 두 작전 모두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소중한 정보유산도 많이 남겼는데, 오늘의 우리는 이를 계승 발전시키는데 미흡했다

무엇보다 사사로움을 버리고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멸사봉공의 희생정신은 모든 정보인의 롤모델로 삼아 계승해야 하는데, 이들을 기억하려는 노력조차 소홀히 했다. 미국과 비교된다. 미 독립전쟁 당시 교사로 일하다 자원해 스파이가 된 네이선 헤일(Nathan Hale)이 21살 나이에 처형당하자, 미국은 그 희생정신을 사회적 자산으로 발전시켰다. CIA는 본부에 그의 동상을 세워 그 정신을 이어받고 있으며, 모교인 예일대도 그의 동상을 세워 매일 기리고 있다. 고향 코네티컷주는 그를 ‘코네티컷주 영웅’으로 선정했다.

독립정보전 수행 당시 축적한 정보노하우는 그 나라 국가정보의 중요한 자산이다. 이스라엘·인도·알제리 등 독립전쟁을 겪은 국가들은 모두 그 당시 축적한 정보자산을 오늘날 더욱 발전시키고 있다. 우리는 이 부분도 미흡하다.

독수리작전과 냅코작전 속에 깃든 정신적 유산과 훌륭한 정보자산을 계승 발전시키는 일은 국가정보의 백년대계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최성규 고려대 연구교수. 국가정보원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국제안보 분야에 종사했다. 퇴직 후 국내 최초로 비밀 정보활동의 법적 규범을 규명한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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