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슬픔도 흘러갈까

2025-03-02

※소설, 영화, 연극, 뮤지컬, 웹툰 등 재미있는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만 소비하기에는 뭔가 부족함을 느낄 때가 없던가요?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다양한 경제적, 사회적 읽을거리가 더해진다면 훨씬 더 재밌을 지 모릅니다. ‘일타쌍피 스토리노믹스’는 이야기에 플러스 알파를 더하는 경향신문 칸업(KHANUP) 콘텐츠입니다. — <흐르는 강물처럼>과 퀴블러 로스의 슬픔 5단계

한 문장이 소설 전체를 재배하는 작품이 있다. 한 컷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작품도 있다. 투척한 낚싯줄이 하늘을 수 놓는 한 컷의 사진은 조건반사처럼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을 떠올리게 한다.

로버트 레드포드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은 대자연을 배경으로 살아간 한 가정사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반추케 한다.

1910년대 미국 몬태나주 미줄라의 송어가 많은 빅블랙풋 강가.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인 리버런드 맥클레인은 두 아들 노만, 폴과 플라이 낚시를 즐기고 있다. 미끼를 멀리 던져 송어를 낚는 플라이 낚시는 상당한 경험과 기술이 필요하다. 두 아들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목사이자 플라이 낚시꾼’이다.

같은 배에서 나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는 둘이지만 성격은 상반된다. 형 노만은 지적이고 진중하며 순종적이다. 반면 동생 폴은 자유분방하고 충동적이며 반항적이다. 마침내 노만은 동부의 명문대에 진학하고 폴은 고향에 남는다. 6년 뒤. 공부를 마친 노만이 고향에 돌아오자 폴은 기자가 돼 있다. 하지만 폴의 생활은 방만하다. 자기절제와 금욕적인 삶을 이어가는 아버지는 폴이 마뜩찮다.

형 노만은 마침내 시카고대 교수 제안을 받는다. 아버지 리버런드와 노만, 폴은 마지막 낚시를 떠난다. 폴은 자기만의 독특한 ‘쉐도우 캐스팅(그림자 투척)’으로 초대형 무지개 송어를 낚는다. 쉐도우 캐스팅은 미끼(플라이)를 공중에서 여러번 멈추거나 흔들어주는 것으로 마치 곤충이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이게 해서 물고기의 관심을 끌게 한다. 자유로운 영혼과 자연과의 조화. 언제나 엄격하고 칭찬을 자제하던 아버지는 마침내 폴을 “훌륭한 낚싯꾼”이라 부르며 인정한다.

그러나 3부자의 화해도 잠시, 노만이 시카고로 떠나기 직전 폭행당해 뒷골목에 버려진 폴의 시신이 발견된다. 노만으로 부터 폴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리버런드 부부는 말을 잇지 못한다. 충격을 받은 리버런드 부인은 쓰러질 듯 자신의 방이 있는 2층으로 향한다.

아버지 리버런드가 말한다. “더 할말있니?” 노만이 말한다. “손뼈가 완전히 부러졌어요” “어느 손?” “오른손요”. 리버런드도 비틀거리며 2층으로 올라간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쉽지 않다. 스위스 정신과 이사였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에 따르면 사람들은 5단계에 걸친 애도의 과정(Grief Process)을 거치게 된다.

1단계는 부정(Denial)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게 사실일리 없어”라고 생각하는 단계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부정은 2단계 분노(Anger)로 바뀐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분노와 원망이 치솟는다. 자신, 타인 혹은 신이나 사회에 화를 내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면 3단계 협상(Bargaining)으로 넘어간다. “만약 내가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라는 후회의 감정들이 밀려든다. 4단계는 우울(Depression)이 몰려온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깊은 슬픔과 절망을 경험하는 것이다. 무기력하고 고립감도 느낀다.

마지막 단계인 5단계에 이르러서야 현실을 수용(Acceptance)하게 된다. 상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현실을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이다.

5단계는 반드시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또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은 단계를 거치지도 않는다. 퀴블로 로스는 이같은 애도 5단계 모델을 1969년 출간한 저서 <죽음과 죽어감>에서 처음 제시했다.

둘째아들 폴을 잃은 리버런드 가정도 애도 5단계를 거친다. 경찰이 폴의 사망소식을 전했을 때 형 노만은 경찰에게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다. 노만으로부터 폴의 사망소식을 전해들은 폴의 부모님도 비틀거리며 자리를 피할 뿐이다. 폴이 죽었다는 것을 가족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는 ‘부정’의 단계다.

‘시간이 지날 수록 아버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내가 모든 것을 말했는지 묻고 또 물으셨다“

폴의 죽음 이후 리버런드는 큰 아들 노만에게 폴의 죽음에 관해 혹은 빼먹은게 없는지 계속해서 묻는다. 폴의 죽음에 대한 분노를 애써 억누르며 그의 죽음에 혹시 자신이 원인이 된 것은 없는 지를 묻고 싶었던 것이다. 극한 분노 뒤에 찾아오는 협상의 단계로 볼 수 있다. 마침내 아버지는 폴을 “아름다운 아이였다”고 회고한다. 이후 리버런드는 큰아들 노만에게 폴에 대해 더는 묻지 않는다. 마침내 아들의 죽음을 수용한다.

퀴블러 로스의 5단계 모델이 주목받는 것은 죽음 뿐 아니라 이별, 실직, 재난, 투자실패 등 다양한 상실에 대해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식이나 가상통화, 혹은 부동산에 이른바 ‘몰빵’투자를 했다가 자산가격이 폭락하면 투자자들은 “사실이 아닐꺼야”라며 부정한다. 그러다 가격폭락의 원인이나 해당 자산을 사도록한 대상에 대해 분노하고, “그때 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며 협상도 한다. 반토막난 자산을 확인하며 극심한 우울에 빠지다 마침내 이게 현실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심리학적으로 볼때 이같은 5단계 애도모델은 큰 상실에 마주한 개인이 충격을 벗어나기 위한 보호기제로 해석될 수 있다. 예컨대 이같은 5단계 모델을 거치지 않는다면 개인은 큰 상실의 충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를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은퇴를 앞둔 리버런드 목사의 마지막 설교날. 그는 말한다. “우리는 살면서 어려움에 닥친 가족을 도우려 해도 돕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도움을 주려고 해도 거절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해가 어려운 사람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해야 합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작은 개천들이 한 곳에서 만나 하나의 거대한 강이 되고, 그 강물이 도도히 흐르는 것처럼, 각양각색의 인생이 모여 큰 역사적 흐름이 되고, 그 물길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닐까. 흐르는 강물처럼 말이다.

노만은 안다. 인생은 예술작품이 아니고, 영원히 계속될 수도 없다는 것을. 이제 사랑했지만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모두 떠나 보낸 한 노인이 블랙풋 강가에서 홀로 플라이낚시를 한다. 떨리는 손으로 미끼를 매단 그는 여전히 멋스런 자세로 낚싯줄을 투척한다. 그러면서 나직히 읊조린다. “그들은 내 마음 속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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