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사 딸에게 전하는 밥의 인문학
‘녹색혁명’을 이룬 ‘통일벼’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우리나라의 극심한 식량난과 식량 자급 문제를 해결을 위해 당시 대통령은 농촌진흥청(이하 농진청)에 지시를 내렸다.
우리나라 쌀의 변화는 불가능했지만, 통일벼는 1962년에 출범한 농진청이 식량 자급자족을 위해 벼 품종개량사업을 추진하며 기술을 통해 만들어지게 됐다. 그리고 1960년대 후반 국내에서 개발한 12개 품종과 일본에서 들여온 9개 품종을 전국 농가에 보급했다.
하지만 병충해에 약하고 벼 줄기의 길이가 긴 탓에 태풍 피해도 심각해 수확량이 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故 허문회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은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lnternational Rice Research lnstitute, IRRI)와 함께 1971년 새로운 품종 통일벼(IR667)를 세상에 내놨다.
통일벼는 당시만 해도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진 3개종(필리핀·대만·일본벼)을 삼원교배(三元交配)해 개발됐다. 이 같은 통일벼는 일반 품종보다 쌀 생산량이 30% 이상 높은 품종으로 전국에 지속적인 보급을 하게 됐다. 이를 통해 국내 쌀 생산량은 1977년 600만t을 이루면서 세계 최고를 기록했다.
1970년 중반에 이르러 통일벼는 형질을 개량한 품종들을 선보였다. 밥맛을 개선한 품종인 ‘유신’을 비롯해 ‘조생통일’ ‘통일찰’ ‘밀양21호’ 등 다양한 지형과 기후에 맞도록 개발돼 녹색혁명 성취를 선언했고, 쌀의 생산량은 국내 수요를 초과해 해외 수출로도 이어졌다.
통일벼 재배 활성화로 국내 쌀 수확량이 치솟자 1977년도에는 인도네시아에 쌀 7만t을 대여해줬고, 막걸리 제조를 금지한 지 14년 만인 1977년 12월 쌀 막걸리 제조를 허가하기도 했다. 쌀 막걸리의 등장은 그해 10대 뉴스에 포함될 만큼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한국인들은 쌀의 자급자족 성공으로 ‘혼분식 장려운동’ ‘절미운동’ 같은 단어들을 기억의 창고 속에 보관해 놓은 채 가장 먼저 그동안 한이 맺혔던 흰 쌀밥을 배부르게 먹는 것에 소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통일벼는 인디카종(안남미) 특성이 섞여 있는 탓에 미질(米質)에 문제가 있었고, 일반미 아키바레(추청벼)와는 완전히 다른 맛이 나 당시 농촌에서는 ‘보리밥 맛이 통일벼로 만든 밥보다 낫다’는 말이 돌았을 정도로 통일벼의 인기가 저조했다. 이같이 맛이 떨어진다는 맹점을 안고 있던 통일벼 품종은 1980년대 들어서 냉해 피해를 크게 입으면서 믿음을 잃기 시작했다.
결국 1981년부터 1985년까지 해마다 풍년이 들면서 쌀이 남아돌자 쌀 증산이 아닌 감산 요구가 한민족 역사상 최초로 나오기 시작했고, 1991년을 끝으로 통일벼 수매는 종료됐다.
통일벼 강제 정책이 폐기되자 통일벼는 1984년부터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1992년 대한민국 땅에서 재배되지 않게 됐다. 그럼에도 통일벼는 한국 사회와 벼농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통일벼 개발로 식량을 자급하게 돼 녹색혁명을 이루었고, 아프리카에 통일형 벼를 보급하기 위해 농진청의 육종 전문가들이 나서면서 아프리카 세네갈 국민의 식량 자급을 위한 통일형 벼 종자 만들기를 시작했다.
이를 위해 꽃가루 배양을 이용한 ‘약배양 육종’을 통해 인도차이나 반도 안남지방에서 생산되는 인디카와 주산지가 우리나라와 중국인 자포니카를 교배해 중간 종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아프리카에 심을 통일형 품종이었다.
인디카와 자포니카의 장점을 모아 국내 기술로 만들어진 쌀 품종은 ‘이스리(lSRlZ)-6’와 ‘이스리-7’이며, 이 품종으로 세네갈은 2018년 500ha에서 2020년 6000ha로 농지가 급증했다. 여기에 맛있는 쌀을 생산하며, 소비는 물론 더 나아가 수출도 이뤄지면서 국가 경제에도 보탬이 됐다.
이처럼 아프리카 현지에 맞게 개발한 품종은 2024년 3월부터 6개국(세네갈, 케냐 등) 시범사업(종자·농기계·농약·비료 등 지원)에 들어갔으며, 현지 품종과 농법보다 2배에서 4배 더 많은 수확량을 거두고 있다.
이제 농진청은 밥맛 좋고 수량성 높은 품종뿐만 아닌 가뭄, 염분, 병해충 등에 강한 품종 그리고 빨리 심어 빨리 수확할 수 있는 조생종 개발 등으로 농업 한류의 바람을 이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