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두 울산예총 고문(시인, 소설가)의 1980년 삼청교육대 수난기(受難記)를 연재한다. 울산MBC 기자였던 최종두 고문은 1980년 경기도 포천에 있는 군부대에 끌려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연재 글에는 인권을 짓밟는 ‘삼청교육’의 참상이 생생히 그려져 있고, 1970~80년대 울산의 정치, 경제, 언론, 문화계 비사(祕史)도 엿볼 수 있다. 최 고문은 “1980년대는 찬탈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영혼을 뭉개버리는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고, 전주 같은 목봉을 힘겹게 들게 하면서 서막을 열었다”며 “몽둥이와 총으로 지레 겁을 주며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가를 실험한 것이 제5공화국의 주구들”이라고 술회했다. <편집자 주>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 조금이라도 그 삶을 연장하기 위해 약으로 먹는 개고기라 하더라도 그와 같이 앉아 그것을 먹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싫어지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완강하게 말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걸어간 길로 뛰어갔다. 그가 보이지 않았지만 더 뛰어가 그와 같이 마주 서게 되었다.
“김 선생님! 나는 개고기를 먹긴 하지만 어머니가 간곡하게 말리는 음식이어서 먹을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내일 점심 약속은 없었던 것으로 해야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언제쯤 한 번 제가 김 선생님을 모시는 기회를 잡아보겠습니다.”
그는 침을 한번 삼키고 나서 또 나의 손을 잡았다. 싸늘한 그의 손이 나의 손을 잡을 때 나는 그에게 품었던 증오가 녹아내리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최 형! 다 잊어버리셨다니까 나는 오늘 최 선생의 넓은 마음을 보고 돌아갑니다만 아무쪼록 건강관리 잘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는 다시 머리를 몇 번 숙인 다음 걸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고 있었다. 나에게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며 얼마나 망설이다 찾아왔을까? 또 얼마나 불면의 밤을 보내면서 괴로워했을까? 시한부 인생의 망연함 속에서 허무와 무상을 씹고 있을 그가 자꾸만 가련해 보였다.
나는 이제 나를 생지옥으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가장 저주스런 인물로 꼽고 있던 보안대의 저 김00를 만나게 됨으로써 나도 모를 이상한 느낌을 갖게 되려는 것 같았다. 마치 치열한 싸움에서 이긴 자가 갖는 승자의 쾌감이랄까? 그런 것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그러기에 도둑을 맞게 된 자는 다리를 뻗고 잘 수 있어도 훔친 자인 도둑은 다리는 물론 육신과 마음까지 웅크린다는 말이 있었던가? 그러나 저 처량해 보이는 자는 죽음을 바로 앞에 둔 운명의 마지막 인생을 살고 있지 않는가? 풀 죽은 채 걸어가던 그의 모습에 연민의 정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직도 저런 모습으로 만나야 할 인물이 두 사람이나 남아 있다. 옛날 포도청의 사또 같았던 바로 백모 경찰서장. 나는 그가 지금 어느 곳에서 그때처럼 덩덩거리며 지위를 뽐내고 있을지, 무슨 직책으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가 내뱉은 말처럼 하느님을 향해 주기도문을 외며 업무를 보고 있기를 바라고 싶었다.
그가 저 김00같이 보잘것없는 나를 찾아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것도 나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모 지국장은 내가 찾아가 만나고 싶었다. 그래도 한때 그와 나는 수석의 취미를 같이 하며 서클에 같이 참여한 석우(石友)였다. 그는 처음 울산으로 와서는 부두 노동자로 일하며 살아보려고 무던히 애쓰던 친구였다. 그러다가 천신만고 끝에 중앙일간지의 지국장을 맡으면서 동료 박 기자와 어울리게 되었고, 그러다가 열두 명의 뜻 맞는 애석인들이 모여 12인 애석회를 만들고 의좋게 지냈던 친구였다.
어느 날 탐석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서 그가 만났던 교통사고는 그의 생명에 위협을 느낄 만큼 큰 사고였다. 그 사고로 세상을 하직하려 할 뻔했던 그때 병문안을 찾아 P기자와 서로 부둥켜안고 눈시울을 적시며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였다.
그런데 그가 일어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 모래무지 섬의 사리 채취 현장에 넣기로 한 장비는 내가 내보낸 보도로 인하여 다 잡은 황금을 놓쳐버리게 하고 말았으니, 비록 그것이 기자로서의 옳은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인간적으로는 어쩐지 미안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를 한 번쯤 내가 찾아가 저 김00가 하듯이 그의 손을 잡고 왔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수소문 끝에 그의 고향 마을 집 주소를 알게 되었다.
아내에게 그를 찾아가 만나봐야겠다고 했더니 아내는 손을 저으며 반대하는 것이었다. 사실, 고향을 떠나올 때 웬만큼 성공하지 못하면 다시는 고향으로 가지 않겠다던 친구였다. 그 사리채취업자의 현장에 계획대로 그가 투입하는 장비가 들어갔다면 그는 꽤 많은 돈을 벌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 생각을 하면 더 미안한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아직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작업장을 향해 막 돌아서려는데 난데없는 영업용 택시 한 대가 클락션을 울리며 멈추었다. 고개를 돌렸을 때 아내가 손을 내젓고 내리며 빨리 차에 타라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는가? 하는데 어머니가 위급하다는 기별이 왔다고 했다. 집에 들를 사이도 없이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울산 시내에서 30여 리 떨어진 농소면 호계리의 이모네 집 근방에서 시골집 한 채를 구해 사셨는데 아버지가 떠나신 후로는 어머니 혼자서 생각날 때마다 찾아가 쉬었다 오시던 곳이었다. 우리 내외가 집에 닿았을 때는 이미 어머님이 운명하신 뒤였다.
누이가 마당으로 나와 울어댔다. 심장병으로 고생하시던 어머니는 몇 마디의 말을 남기고 가셨다고 했다. 막내아들인 나를 늘 안쓰러워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듣는 순간 나의 가슴은 바늘이 박히듯 따갑게 아팠다.
“애들도 커가고 있는데 어쩌자고 흙을 만지면서 있는지 내가 만나보라는 사람은 만나지 않고… 인자 너희 아버지가 오라고 손짓하는 거 보니 내가 갈 때가 된 모양이다. 너거 오빠 오거든 어서 다니던 회사에 들어갈 생각이나 하라고 해라…”
숨을 몰아쉬는 어머니에게 물 한 모금을 입에 넣어도 뱉아내며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었다. 우리 내외가 아무리 흔들어 보았으나 눈 감으신 어머니는 한 움큼도 안 돼 보이는 가녀린 시체로 누워 있었다.
시신을 우리 집으로 옮기고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나는 가슴을 쥐어뜯고 싶도록 내가 원망스러웠다. 교육 기간 동안 아픈 심장에다 대못을 박았으면서 돌아와서는 흙에 빠져들어 어머니를 잠시라도 잊고 있지 않았던가? 큰애는 서울에 가 있고 두 딸도 자꾸 커가고 있는데 다니던 회사에 갈 것을 잊고 있었던 내가 어머니에게는 한(恨)이 되었던 모양이다.
아들 다섯에 딸 둘을 낳으신 어머니는 7남매를 기르느라 손발이 닳도록 가난한 살림을 꾸리며 살다 가셨다. 교육대에서 혼절 상태로 웅덩이에 내버려졌던 나에게 나타나시고는 어서 일어나 피해라… 하시던 어머니의 환영(幻影)이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남기고 가신 유언은 회사에 도로 가라는 것이었다. 찾아보려는 사람을 찾아가서 사정 얘기를 다 하고 부탁을 하라고 하신 사람은 그때 울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있던 김00 의원이었다. 그의 장인인 이00 씨가 어머니 고모님의 아들로 어머니와는 사촌 관계였고 그의 부인은 나의 육촌 누나가 되었다.
선거 기간 동안 거의 매일 같이 뛰어야 했던 김00 의원은 나의 중‧고등학교의 선배이기도 하면서 매형이 되는 셈이다. 그 때문에 웬만한 얘기는 서로 나눌 수 있는 사이였었다. 어머니의 문상을 오셨던 그 분이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첫 국정 질의가 있던 3일 전이었다.
전화를 주셨다. 질의 원고를 같이 가다듬었으면 한다기에 우리 내외가 서울로 가서 서교동 자택으로 가게 되었다. 그분은 육중한 체구이면서 무엇이든 꼼꼼히 섬세한 부분까지 챙기는 분이었다. 오랜 관료 생활에 젖은 성품 때문이었을 게다. 안방에서 아내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으시다가 나를 불렀다.
“종두야 와 바라!” “예, 뭣 말입니까?” “자! 나하고 가자!” 누나가 뒤따라와서는 거들었다. “당신 얘기 들어봤지요? 가셔서 만나야 됩니다. 이 사장님과 이00 전무님이 모르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만나서 해결을 보세요.” 남편에게 회사 책임자의 말을 들어보는 게 좋겠다고 하는 누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도 울산에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말을 다 들었어요.”
나는 매형을 따라 MBC 본사로 갔다. 이00 전무님이 반갑게 맞으면서 방으로 안내했다. “수석님! 나도 이 최 형을 잘 압니다. 당시 국보위에 알아보았더니 복직 조치를 했다 하길래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곳으로 와서 찾아보니 복직이 안 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장님이 중국 출장에서 돌아오시면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사장님이 중국 출장에서 사흘 후면 돌아오신다고 했다. 이 전무님은 현관까지 내려와서 우리를 배웅했다.
최종두 시인, 소설가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