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은 어렵고, 절차는 까다롭고, 결과에 따르는 책임은 막중한데 보수는 턱없이 낮거든요. 사실상 재능 기부 수준이죠.”
한영 통역사 A(40대) 씨는 서울 내 법원 두 곳과 경찰서 한 곳의 ‘지정 통역인’으로 등록돼 있다. 하지만 ‘당연히’ 다른 통역 분야가 주 수입원이다. 워낙 사법 통역 업무의 보수 요율이 낮고 일정 변동성도 큰 탓이다. A 씨는 “사법 통역은 통·번역 업계에서 수요가 거의 없고 신규 유입 또한 적은 분야”라며 “법정 통역 경험을 살려서 민간 로펌,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등 더 조건이 좋은 곳으로 떠나는 이들이 상당수”라고 말했다.
국내 체류 외국인 수가 증가하며 관련 범죄 역시 늘어나는 가운데 사법 통역 인력 확보의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사법 통역사는 수사기관 및 법원의 요청에 따라 외국인 피의자 조사, 구치소 접견 동행, 재판 등 각종 법적 절차에 대한 통역 업무를 진행한다. 하지만 법원이 주관하는 ‘법정 통·번역인 인증 평가’를 통과한 통역 인력은 전국에 200명을 밑돌고 지역별 인력 격차도 수십 배에 달하는 등 편차가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16일 서울경제신문의 취재를 종합하면 전국 58개 법원에 등록된 법정 통역인 후보자는 총 5198명(중복 등록 포함, 올해 11월 기준)이다. 이 가운데 36%(1890명)가 서울 소재 법원 10곳에 등록됐다. 인천·경기 소재 법원까지 포함하면 전체 인력 중 60%(3123명)가 수도권에 몰렸다. 가장 통역 인력이 적은 지역은 제주도로 제주지방법원 1곳에 28명이 이름을 올렸다.
법원별로 보면 대전지방법원(홍성지원)과 청주지방법원(영동지원)이 2명으로 가장 적었다. 각각 지원 가능한 언어도 중국어·수화, 중국어·베트남어 등 2개에 그쳤다. 24개 언어를 지원하는 서울중앙지방법원(403명)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법정통역인 B 씨는 “지방에서는 법정 통역인을 구하기 너무 어려워 웃돈을 줄 테니 와달라고 읍소하는 수준”이라며 “보통 통역인 1명이 여러 법원에 등록돼 동시에 요청을 받다 보니 재판 일정이 갑자기 바뀌었을 때 일정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을 찾기 매우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애초에 인력 풀이 작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해 대법원이 실시한 ‘법정 통·번역인 인증 평가’를 통과한 사람은 606명 중 140명뿐으로 합격률이 20%대를 맴돌았다. 복잡한 법률 지식을 요구하는 까닭에 시험을 시작한 이래 가장 합격률이 높았을 때(2021년)조차 56%에 그쳤다.
힘들게 시험을 통과한 뒤에도 대우가 좋지는 않다. 4년 차 법정 통역인 C 씨는 “사법 통역인은 한마디만 실수해도 누군가의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보니 심리적 부담감이 매우 크고 준비 과정에서 업무 강도 또한 높다”면서 “하지만 비용은 다른 통역에 비해 절반에도 못 미치는 ‘푼돈’ 수준이다. 선고 기일의 경우 30분 만에 판결이 끝나면 교통비가 더 들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다른 일감과 법정 통역 일정이 겹치면 후순위로 밀리기 십상”이라고 덧붙였다.
그나마 공식 인력 선발·관리 체계가 있는 법원은 상황이 나은 편이다. 법원보다 상황적 변수가 많은 검경에서는 더욱 통역의 질을 담보하기 어렵다. 수사기관의 경우 비정기적으로 모집 공고를 올려 그때그때 민간 사법 통역인을 구하는 식이다. 경찰서 통역 경험이 있다는 프리랜서 한독 통역사 D 씨는 “통역 실수가 발생하기 너무 쉬운 환경”이라며 “긴장하고 흥분한 피의자가 번복할 때가 많고, 갑자기 출석하느라 전화로 통역하는 경우도 흔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결혼이주여성부터 통역 대학원생까지 인력별 능력치가 천차만별이라 1·2차 조사 때마다 다른 사람을 불러서 틀린 부분을 확인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A 씨 역시 “경찰 조서상 통역이 엉망이라 법정에서 진술 내용이 뒤바뀐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이런 가운데 외국인 범죄는 매년 늘고 있다. 법원에 따르면 형사재판(1심)에 넘겨진 외국인은 2014년 3751명에서 지난해 5854명으로 56% 늘었다. 전문가들은 범죄에 휘말린 외국인들이 명확히 입장 표명을 할 수 있도록 사법 통역 인력의 충원 및 균등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이윤호 고려사이버대 경찰학과 석좌교수는 “다문화 사회 흐름 속에서 범죄 최일선에 선 경찰이 상시 통역 인력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며 “최소한 지방청 단위로라도 공식 인력 풀을 운영하고 전문 수사 용어와 관련된 가이드북을 공유하는 식으로 균질한 사법 통역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