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스타트업열전] 계엄사태 보며 '정치 혁신할 기술'을 생각하다

2024-12-18

[비즈한국] 베를린에서 일하는 필자의 사무실은 약 140개의 스타트업, 대기업, 연구소, 공공기관 등이 모여 있는 거대 산업 단지 내 공유 오피스에 있다. 지난 12월 3일 독일 시각 오후 3시~4시경 하나둘 주변 동료들이 우리 사무실로 찾아와 한국에 있는 가족이 괜찮은지 안부를 물었다. 한국에 지금 ‘전쟁법(Kriegsrecht)’이 발동되었다는 속보를 봤다는 것이다. 사실 ‘Kriegsrecht’라는 단어는 평소에 들어본 적이 없어 생소했지만, ‘전쟁’을 의미하는 ‘크릭(Krieg)’과 ‘법’을 의미하는 ‘레히트(Recht)’라는 단어는 각각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언가 큰 일이 생긴 게 틀림없구나 생각했다. 즉시 한국 뉴스와 독일 주요 언론사 웹사이트를 들어가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주요 독일 언론이 일제히 한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음을 속보로 전했고, 국회에 군인들이 들이닥치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흘러나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약 2주간을 한국 소식에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음을 안정시키기도 어려웠다.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 모두가 그러했으리라.

덕분에 계엄령(Kriegsrecht)이라는 독일어 단어를 알게 된 것, 국회 및 헌법과 관련한 용어를 익히게 된 것, 한국의 시민 의식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선진적이라는 점을 알게 된 것 말고는 화가 나고 허탈하고 무기력했다가, 다시 피가 끓는 시간이 반복되었다.

참, ‘윤(Yoon)’도 독일에서 나름대로 하나 얻게 된 점이 있다. 북에 있는 ‘김용운’(김정은의 독일식 발음)’ 못지않게, 비슷한 독재자의 이미지로 자신의 이름 세 글자를 각인시켰다는 점이다(아니, 네 글자다. 독일인들은 ‘윤 숙 예올(Yoon Seok Yeol)’로 읽으니까).

이 시국에 유럽의 혁신과 스타트업의 활동을 알리는 이 원고를 쓰는 데도 손이 잘 잡히지 않는다. 국민의 기본권이 발휘되지 못하는 무서운 상황이 언제 또 올지 모른다는 생각과 더불어 한국의 가족과 친구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가장 도움이 된 것은 유튜브를 통해서 접하게 되는 한국의 집회 장면이었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이렇게 시적인 가사를 지니고 있는지 이제 알았고, 새로운 세대를 통해 사회는 천천히, 그렇지만 지속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주주의의 위기나 사회적 갈등은 때로는 새로운 혁신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는 생각을 애써 하면서, 그런 혁신을 돕는 정치 도구들이 무엇이 있을까 찾아보았다.

#시민을 위한 일상 기술 ‘시빅 테크’

유럽에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시빅 테크(Civic Tech)’, 즉 시민 참여와 공공 문제 해결을 위해 기술을 활용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시빅 테크는 시민들이 정부, 공공 기관, 또는 사회 문제에 더 쉽게 접근하고 참여하도록 돕는 기술적 솔루션을 의미한다. 2000년대 초반부터 인터넷 및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면서 ‘디지털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발전해왔고, 오픈 데이터 운동을 통해 시민들이 데이터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실제 이를 하나의 스타트업이나 회사로 만들지 않더라도 사회에 충분히 의미 있는 기술혁신으로 자리 잡은 사례들이 있다. 스페인의 ‘데시딤(Decidim)’은 대표적인 시빅 테크 사례다.

데시딤(Decidim)은 바르셀로나시가 개발한 시민 참여 플랫폼으로, 정책 수립 과정에 시민들이 직접 의견을 제시하고 토론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 시민들은 정책에 대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등록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토론하며 이를 투표로 이어간다. 주로 기본계획(PAM)과 지구계획(PAD) 등 주요 도시계획에서 시민 제안을 수렴하고 정책을 평가하는 과정이 핵심 기능이다. 기존의 비효율적인 의견 수렴 방식과 달리, 투명하고 공정한 시스템을 통해 신뢰를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핀란드 헬싱키, 일본 카코가와시, 미국 뉴욕시 등이 벤치마킹을 할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이번 한국의 비상계엄 해제과정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출석했는지, 어디에 찬성표를 던지고 어디에 반대표를 던졌는지는 모든 국민의 관심사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설립된 NGO인 보트왓치 유럽(VoteWatch Europe)의 기술은 유럽의회와 EU 이사회 의원들의 출결 및 투표 정보를 제공하는 플랫폼이다.

보트왓치 유럽은 EU 이사회 의원과 유럽의회 의원의 투표 기록을 수집하여 분석하고, 이를 그래픽 및 통계 형태로 제공한다. 이 데이터는 시민, 언론인, NGO, 이해관계자들이 EU 정책 결정 과정을 투명하게 이해하고, 정치 그룹 및 국가별 대표들의 정책 입장을 파악하는 데 유용하다.

보트왓치 유럽은 2008년부터 2022년까지 운영됐으며, 유럽의회와 EU 각료이사회의 투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했다. 이러한 데이터는 현재도 연구 및 분석 목적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다.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이 공동으로 설립한 고등 연구기관인 유럽대학원(EUI, European University Institute)의 사이먼 힉스(Simon Hix)교수 팀이 이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가짜 뉴스와의 전쟁 ‘팩트 체크’ 기술

정치적 혼란이 발생하면 잘못된 정보와 가짜 뉴스가 범람하게 된다. 유럽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팩트 체크와 정보 검증 기술을 제공하는 스타트업이 있다.

영국의 팩트마타(Factmata)는 AI를 활용해 온라인 정보를 분석하고 가짜 뉴스를 탐지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팩트마타는 온라인상의 신뢰할 수 없는 콘텐츠, 가짜 뉴스, 혐오 발언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연어 처리(NLP) 기술과 전문 커뮤니티를 결합한 플랫폼이다.

인터넷에는 매일 수백만 개의 콘텐츠가 생성되지만 그 중 많은 부분이 편향적이거나 오해를 유발할 수 있다. 팩트마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AI 기술을 활용해 유해하거나 불신할 수 있는 콘텐츠를 자동으로 탐지하고 분류한다. 특히 24개의 전문가 커뮤니티와 2000명 이상의 저널리스트 및 연구원이 AI 알고리즘을 학습시키는 훈련 데이터셋을 지속적으로 구축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콘텐츠는 신뢰성을 평가하는 신뢰 등급을 받게 되며, 독성 수준, 정치적 편향, 클릭베이트 여부 등 9가지 신호를 통해 종합적으로 분석된다.

팩트마타는 2022년 11월에 PR 미디어 기업인 미국의 시전(CISION)에 인수되었다. 시전은 약 10만 명의 고객을 보유한 전통 PR 기업으로, 팩트마타의 IPQ뿐만 아니라 CEO인 앤토니 커즌스(Antony Cousins)를 포함한 총 직원 7명을 모두 영입해 시전의 AI 기반 자동화 도구를 강화할 예정이다.

영국의 스타트업 로지컬리(Logically)도 AI와 인간의 전문성을 결합하여, 유해하고 문제가 있는 온라인 가짜 뉴스, 가짜 정보와 싸우고 있다. 로지컬리는 2017년 런던에서 설립되어 현재 미국과 인도에도 사무실을 두고 있다. 주로 뉴스 기사, 소셜미디어 게시물 등을 분석해 신뢰성을 평가하고, 가짜 뉴스를 식별한다. 국가 안보 및 공공 분야와 관련해 정부 부처와 일하거나 기업의 브랜드 가치를 보호하는 솔루션을 제공해 다양한 기업들을 고객사로 두고 있다.

#정부 혁신과 협력, 유럽의 ‘거브테크’ 트렌드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행정 효율성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다. 인공지능 및 ICT 기술이 공공 행정 업무에 접목되는 ‘거브테크(GovTech)’는 전 세계적인 화두다.

이번에 한국의 계엄이 큰 유혈 사태 없이 끝날 수 있었던 것도 유튜브, 스마트폰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덕이었다. ‘2024년에 이런 일이?’라고 모두가 설마설마 했다는 것은 그만큼 일반 시민들의 생활과 국가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 사이에 격차가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여전히 국가가 세금을 징수하고,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고, 복지를 분배하며 안전을 유지하는 방식이 현재의 디지털화 발전 수준에 크게 못 미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시민들은 우버, 카카오뱅크, 구글을 사용하는 소비자 앱 경험에 매우 익숙하다. 더더욱 공공 서비스 제공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있을 수밖에 없다.

컨설팅 회사 액센츄어가 2018년 낸 보고서에 따르면 거브테크 분야에 약 4000억 달러(575조 원)가 투자되었다. 유럽에서는 매년 220억 유로(33조 원)가 거브테크에 투자되며, 그 중 상당 부분이 첨단 기술에 사용된다.

덴마크의 넴콘토(NemKonto)와 넴아이디(NemID)는 거브테크의 중요한 예이다. 이 두 가지는 덴마크 정부가 디지털 행정을 효율화하기 위해 도입한 핵심적인 디지털 시스템으로 전체 국민의 인구의 95%가 이를 사용한다. 넴콘토는 덴마크 정부 및 공공 기관이 개인 또는 기업에게 지급금을 이체할 때 사용하는 표준화된 은행 계좌 시스템으로 세금 환급, 보조금, 연금, 급여, 실업 수당 등 모든 공공 지급금을 넴콘토를 통해 자동으로 지급한다. 기존 사용하는 계좌를 넴콘토로 지정하기만 하면 되기에 편의성도 높다.

넴아이디는 디지털 신원 인증 시스템으로, 온라인 서비스에 안전하게 로그인하거나 디지털 서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2022년부터는 넴아이디의 후속 시스템인 밋아이디(MitID)를 도입해 더 높은 수준의 보안 기능을 제공한다. 넴콘토와 넴아이디는 이미 2005년 도입된 것으로 거브테크의 원조격이라고 볼 수 있다.

에스토니아는 거의 모든 공공 서비스를 블록체인 기반의 식별 시스템을 통해 제공하는 고도로 발전된 전자정부 인프라를 구축했다. 가장 디지털화가 잘된 정부의 모범사례로 꼽히는 것이 에스토니아다.

유럽에선 각 국 정부와 협력해 공공 서비스를 디지털화하는 거브테크(GovTech) 스타트업 육성을 위해 EU가 발벗고 나섰다. 특히 2024년 4월에 시행된 유럽 상호운용성 법안(Interoperable Europe Act(IEA))을 통해 여러 정부 간의 기술적 협력을 촉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EU는 거브테크 커넥트(GovTech Connect) 프로젝트를 출범해 중소기업과 공공·민간 기관의 협력을 강화하고 혁신을 가속화하고 있다. 또 거브테크포올(GovTech4All) 프로젝트에 18개국 26개 조직이 참여해 데이터 공유, 개인 규제 보조 도구, 혁신적 조달과 같은 파일럿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정치적 혼란은 사회적 불안을 초래하지만, 동시에 기술 혁신의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말로 칼럼을 마무리해볼까 했다. 하지만 탄핵이 인용될지 기각될지, 여전히 안심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AI라면 하루 안에 정확하게 결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냉소적인 마음도 든다. 유럽의 시빅테크(Civic Tech), 거브테크(GovTech) 사례를 통해 정치도 혁신이 가능할지 잠시 상상해보았다.

어쨌거나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 않고, ‘눈앞에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라는 노래를 흥얼거릴 수밖에. 모두가 가진 스마트폰이라는 도구 덕분에 80년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기술이 단순한 도구를 넘어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사회적 갈등을 완화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필자 이은서는 한국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베를린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예술의 도시이자 유럽 스타트업 허브인 베를린에 자리 잡고 도시와 함께 성장하며 한국과 독일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잇는 123factory를 이끌고 있다.​​​​​​​​​​​​​​​​​​​​​​​​​​​​​​​​​​​​​​

이은서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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