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복합 위기에 직면했다. ‘반도체 자립’을 내세운 미국은 관세를 무기로 메모리 반도체도 미국에서 생산하라고 요구할 가능성이 있고, ‘반도체 부활’을 꾀하는 일본은 2나노(㎚·1㎚=10억 분의 1m) 첨단 공정을 앞세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의 주도권을 노리고 있다.
美반도체 자립, 마지막 퍼즐은 메모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3일(현지시간) “반도체 품목별 관세가 아주 곧(very soon) 시작될 것”이라고 밝히면서, 한국 반도체 기업을 겨냥한 협상 카드가 주목된다. 전날 “관세는 우리에게 엄청난 협상력을 주고 있다”고 발언한 만큼 향후 메모리 반도체의 미국 내 생산을 요구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현재 미국은 반도체 설계 기술뿐만 아니라 TSMC의 애리조나주 공장을 통해 생산과 후공정(패키징) 설비도 확보한 상태다. 하지만 메모리 반도체는 여전히 한국 생산 분에 의존하고 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미국 입장에서는 메모리 반도체 기업이 마이크론 하나뿐이라 자국 내 생산 기반을 더 확충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특히 인공지능(AI) 열풍으로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고성능 메모리의 전략적 가치가 부각되고 있지만, 마이크론의 기술력과 생산 능력은 여전히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보다 뒤처져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만과 한국을 겨냥해 수차례 반도체 산업을 “도둑 맞았다”고 언급한 점을 감안하면, TSMC가 파운드리와 첨단 패키징 시설을 미국에 투자한 것처럼 한국에도 메모리 생산 시설을 투자하라는 압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지난해 기준 한국의 전체 반도체 수출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7.5%에 불과했지만, 이 중 79.6%가 메모리 반도체였다. 향후 미국 내 반도체 칩 생산이 확대될수록 한국산 메모리의 미국 수출량이 증가해 한국 기업들의 관세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日 라피더스 “빅테크와 협상 중”

파운드리 시장에서는 일본의 추격이 거세다. 일본의 파운드리 기업 라피더스는 애플·구글 등 40~50개 기업으로부터 수주하기 위해 협상 중이라고 공개하는 등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일본 정부와 토요타자동차 등 일본 대기업 8곳이 공동 출자해 설립한 라피더스는 2027년에 2나노 반도체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TSMC는 올해 하반기부터 2나노 양산을 시작한다.
고이케 아쓰요시 라피더스 최고경영자(CEO)는 TSMC보다 2나노 양산이 2년 늦은 데 대해 “제조 공정에서 그 차이를 충분히 메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5일 닛케이신문에 “주문부터 칩 제작 및 조립까지 걸리는 시간을 지금보다 2~3배 더 짧게 줄일 수 있다”며 “프로토타입(시제품) 개선 속도가 빠르고 수율도 점차 향상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라피더스에 출자금 포함 누적 1조8225억엔(약 18조1300억원)을 투자했다.
관세·기술 공세 쏟아지는 한국 반도체
현재 삼성전자는 D램 전량을 국내에서 생산하고 있으며, SK하이닉스는 중국 우시에 일부 D램 생산라인을 두고 있지만 HBM 등 첨단 공정은 국내에서 마무리하고 있다. 고부가가치 메모리 생산이 일부라도 미국으로 이전될 경우 국내 반도체 산업 내 일자리 감소, 생태계 약화, 기술 유출 논란 등 후폭풍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삼성전자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36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지만 전기와 용수 문제 등 걸림돌이 여전하다”며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관세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더 많이 투자할 수 있도록 정부는 과감한 정책 지원과 안정적인 투자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