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미 관세 협상이 마지막까지 왔다. 8월 1일 관세 부과 하루 앞이다. 농산물 시장 개방, 쇠고기 수입 확대, 조선 분야 협력 그리고 대미(對美) 투자 확대를 두고 줄다리기를 계속하고 있다. 상호관세 15%, 자동차 관세 15%로 매긴 일본, EU 수준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지 초미의 관심사다. 우리 정부는 막바지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특히 대미 투자가 눈에 띈다. 외신은 미국 측 4000억 달러 요구와 거기에 못 미치는 우리측 제안이 맞서고 있다고 한다. 어느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지든 막대한 규모다. 지금 한국은행 외환 보유액이 4100억 달러다.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 숫자를 맞추나? 가뜩이나 어려운 시기, 큰 부담이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협상 끝에 만약 대미 투자가 결정된다면 이제 새로운 상황에서 또 활로를 찾을 수밖에 없다.
막바지에 이른 한·미 관세 협상
대규모 대미 투자 합의 가능성
철저한 준비와 전략적 운용으로
우리 실익 확보와 호혜적 결과를
관세는 지금 우리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이지만 투자는 앞으로의 약속이다. 관세가 현찰이라면 투자는 어음이다. 일본, EU 예를 보면 이번 합의엔 규모만 있고 어떻게 조달하고, 어디에 투자할지는 뒤로 미뤄 둘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협상 타결 이후 계획을 잘 세워 그림을 그려야 한다.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어려운 형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시작하는 투자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마당에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분야로 투자가 향해야 한다. 첨단 기술, 양자 컴퓨팅, 반도체, AI 분야를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다. 2023년 8월 캠프 데이비드 합의 이후 한미 간 핵심 기술과 경제 안보 협력이 언급됐지만 실제 사업으로 진행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말’은 있었지만 ‘사업’은 없었다. 이번 투자를 계기로 구체적인 공통 프로젝트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 공급망 재편과 경제 안보 체제 구축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수 있지 않을까. 한미 공동으로 공급망 보험기구나 반도체 펠로우쉽 프로그램 같은 걸 만들 수도 있다.
더해 미국 측이 기대하는 영역에 투자를 추진할 수도 있다. 조선산업이 대표적이다. 조선 협력과 투자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한미 조선소 현대화 펀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방산 분야도 있다. 논란이 있지만 알래스카 LNG 개발 투자 역시 미국 측 관심 분야다. 지금 양측 입장이 맞서는 농축산업에 대한 투자도 살펴볼 수 있다. 우리 시장 개방이 어렵다면 이를 상쇄하기 위해 관련 산업에 투자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분야도 분야지만 계산도 중요하다. 대미 투자 총액 숫자에 뭐가 들어갈지 합리적으로 정해야 한다. 예컨대 그간 이런저런 계기로 ‘약속’은 있었지만 아직 집행되지 않은 우리 기업의 미래 투자는 여기 포함돼야 한다. 엄연히 ‘신규 투자’다. 장기간에 걸친 협력 사업의 제반 요소도 여기 들어와야 한다. 조선산업에서 한국의 기술 제공과 인력 양성을 미국은 고대한다고 한다. 효과를 보려면 앞으로 10여년은 족히 걸린다 한다. 이런 직간접 비용들도 모두 투자 금액에 잡혀야 한다.
앞으로 이러한 전략적 고려를 하려면 반드시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 있어야 한다. 미국 측과 긴밀한 협의는 필요하지만 운용은 우리 몫이다. 일본, EU 합의엔 이 부분이 불분명하다. 우리는 이를 명확히 해야 한다. 돈만 대는 물주(物主)가 아니라 전주(錢主)로서 역할이 필요하다. 그래야 국민적 공감대도 생길 것이다.
우리 국내적으로 살필 일들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대미 투자가 이제 우리의 ‘전략 자산’이 되었다. 이에 걸맞게 체계적으로 추진돼야 한다. 단순히 특정 기업의 공장 건설 문제가 아니라 한미 관계의 중요한 지렛대가 되었다. 정부와 기업의 주도면밀한 협의와 조율이 따라야 한다.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야 한다. 기획부터 집행까지 철저한 협업과 분업이 필요하다. 새로운 차원의 민관협력이다.
정부 출연기관도 있지만 결국 민간기업이 대미 투자의 큰 부분을 차지하리라 본다. 이들의 투자를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 투자 여력을 찾는 게 먼저다. 하지만 투자 여력이 있더라도 투자 결정에 법적, 제도적 리스크가 따른다면 선선히 대미 투자에 나서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민관협력의 일환으로 추진되는 ‘전략적’ 투자에는 안전판이 있어야 한다. 대미 투자 확대는 일부 생산시설이 옮겨 간다는 걸 의미한다. 국내 연관 산업 피해 구제가 중요한 숙제다. ‘무역조정지원법’, ‘FTA 농어업법’ 등으로 적극 지원에 나서야 한다. 그리고 가급적 ‘시설 이전형’이 아닌 ‘현지 창출형’ 투자를 계획해야 한다. 대내 설득 없이 이런 대규모 투자는 지속되기 어렵다.
지난 6개월 관세 협상 국면에서 계속 수세에 몰렸다. 만약 이번에 협상이 타결되어 한 템포 쉬며 숨 고르는 시간이 오면 전열을 정비해 후반전 투자 게임은 우리가 주도해야 한다. 지금 대규모 대미 투자는 호랑이 등에 올라타는 것과 같다.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움켜쥐고 달리는 수밖에 없다.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