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단순 기술 아닌 생존 전략
미래 성장엔진으로 육성 절실
단순 부처·수석 신설만이 아닌
정부 전폭적인 지원·대책 필요
지난 주말, 한강변의 한 카페. 자전거를 타다 잠시 쉬던 중년 남성들이 뜻밖의 ‘AI(인공지능) 토론’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챗GPT, 퍼플렉시티, 클로드 중 어떤 생성형 AI가 업무에 더 쓸모 있는지를 놓고 각자의 경험담을 쏟아냈다.
요즘 AI를 써 본 중년들의 반응은 대체로 이처럼 신선한 충격이다. 신문기자로 20년 넘게 일한 필자 역시 초보 수준이긴 하지만 이들 도구를 사용해 보며 적잖이 놀랐다. 예전 같으면 자료 입력과 엑셀 작업만으로도 일주일은 소요됐을 기초 취재가 이제는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더 나아가 그래픽, 교열, 제목 선정, 기사 맞춤형 동영상 제작까지 직업 기자 뺨치게 해낸다.

세계일보 매니페스토취재팀과 한국정당학회가 이번 대선에서 AI 언어모델을 활용해 역대 대선 주요 후보 21인의 217개 공약을 자동 분류·분석한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과거 방식이라면 1개월은 족히 걸렸을 작업이 며칠 만에 끝났다.
밀레니엄으로 설레던 2000년, 기자 초년병 시절 나는 테헤란로에서 밤마다 열리던 닷컴 기업 사교 모임을 취재한 기억이 있다. 서너 시간 만에 받은 명함만 300장. ‘○○닷컴’이라는 타이틀만 붙으면 투자가 쏟아지던 버블의 시기였다. 거품이 꺼지자 그 수많은 명함은 대부분 휴지 조각이 됐지만, 네이버와 다음 같은 생존자는 산업 생태계를 바꿨다.
그 시절 벤처 열풍의 불씨는 김대중정부의 초고속 정보통신 인프라 확대 정책이었다. IMF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과감한 투자로 벤처 붐이 일었다.
지금의 AI 열풍은 결은 다르지만 흐름은 닮아 있다.
저성장 고착, 인구절벽, 기술패권 경쟁이 맞물린 복합 경제위기 속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이틀 만에 ‘AI미래기획수석실’을 신설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AI 부총리 부처’ 개편, ‘AI 100조 투자’, ‘모두의 AI 프로젝트’도 속도를 내고 있다. AI를 국가 생존전략으로 삼겠다는 구상이 구체화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AI 드라이브에 보수진영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 문재인정부 시절 소득주도성장 논쟁처럼 혁신이 곧 이념 논쟁이던 시기와는 확연히 다르다. AI를 통한 성장은 진영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는 공감대가 형성돼서다.
전 세계 AI 시장은 2023년 1966억달러에서 2030년 1조8117억달러로 9배 이상 성장할 전망이다. 미국과 중국, 유럽은 이미 AI를 전략 산업으로 지정하고 민관 총력전이다. 반면 한국은 더디기만 하다. 하버드대 벨퍼 센터 등에 따르면 한국의 AI 기술 경쟁력은 세계 10위권 내외다. 산업계가 처한 현실도 녹록지 않다. 한국무역협회는 AI를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국내 기업은 17%, 핵심 운영 분야에서의 활용률은 10%도 채 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부고속도로가 산업화를 열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초고속 인터넷망이 IT 강국으로 이끌었다면, 이제는 AI가 대한민국 제3의 성장엔진이 돼야 한다. 하지만 선언과 조직 신설만으로 AI 강국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전문 인재를 길러내고, 이들이 머물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하는 일이다.
일단 인재 양성이 시급하다. AI 개발자가 의사처럼 ‘선망의 직군’이 되도록 해보자.
염재호 국가인공지능위원회 부위원장은 세계일보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의 ‘탈피오트 프로그램’처럼 국가가 직접 정예 개발자를 키우고, 병역·장학 혜택을 통해 최고의 두뇌를 AI로 유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논란을 부를 수 있는 방안이지만 적극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정부 조직도 AI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재편하자. 최근 ‘AI코리아’를 펴낸 구윤철 전 국무조정실장은 기자와 만나 “AI는 특정 부처의 전유물이 아니라 전 부처의 기본 인프라가 돼야 한다”며, 각 부처에 AI 전담 책임관(AI Officer)을 두고 정책 분야별 기술 활용 로드맵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 모든 숙제가 지금 막 출범한 이재명정부 앞에 놓여 있다. AI의 시계는 한국만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천종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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