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미디어] 집주인은 죄가 없는 세상

2024-11-21

서울 자취방의 전세금을 아직도 받지 못했다. 3개월이 지났을 무렵, 집주인을 대신해 건물을 관리하는 부동산 중개인을 만났다. 그는 보증금을 주지 않으면 법적 조치를 하겠다는 날 이상한 사람 취급했다. 현재 부동산 상황이 안 좋으니 가만히 기다리는 게 약이라고, 다른 분들은 사정을 알고 기다리는데 그쪽이 뭔데 집주인을 들쑤시느냐며 다그쳤다. 되려 집주인이 어떻게 될까 봐 걱정이라는 것이다. “법대로 하면 뭔가 달라질 것 같아요? 변호사가 돈 찾아 줄 것 같아요? 아니에요. 세입자 아니면 방법 없어요.” 그는 단호했고 또 분명했다. 그러곤 지금 돈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고 있는데 왜 자신을 괴롭히느냐고 호소했다. 말문이 막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내가 드라마에 나오는 악덕 빚쟁이 중 하나가 된 것 같았다.

계속 ‘내 편’임을 주장하던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고 ‘임차권 등기 명령’을 진행했다. 기다린다고 세입자가 나타날 거라는 보장도 없으며, 무엇보다 그 귀인도 2년 뒤 나와 같은 피해자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임차권 등기가 서류에 찍히기까지 2개월이 걸렸다. 계약이 파기된 후 집주인을 믿고, 6개월 가까이 기다림을 택했던 나 자신이 한심했다. 등기부상 임차권 등기가 찍힌 것을 확인한 후, 집주인에게 연락했다. 그런데 집주인은 짠 것처럼 중개인과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내가 임차권 등기를 설정해 앞으로 들어오려는 세입자가 없을 것이니 건물을 경매에 넘길 수밖에 없다며, 내일까지 부모님과 상의 후 임차권 등기를 취소해달라는 것이다. “지금 저 협박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다음 날 온 메시지. ‘상의는 해 보셨나요?’.

나는 ‘법대로’ 하겠다고 답한 뒤 전세금 소송을 진행했다. 한 달 후, 소장을 받은 주인은 아무런 변론을 하지 않았다. 나는 곧 ‘승소’ 판결을 받을 것이다. 이후 해야 할 일을 알아보며 변호사 상담을 받았다. 변호사는 집주인의 신용을 조회해 재산을 압류해야 하지만, 재산이 아무것도 없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렇게 경매에 넘어가면 경매 비용도 만만치 않으며, 경매 이후 받지 못한 전세금은 결국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러 블로그의 후기를 찾아보니 나와 같은 절차를 거치고 답보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많았다. 집주인이 그토록 당당했던 이유가 있었다. 결국, 그들의 말이 다 맞았다. 법이 해결해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여기서 주저앉을 수 없었다. 일단, 국토교통부에 전세 사기 피해자 신청을 했다. 피해자 인정 요건은 전입신고ㆍ확정일자 등 대항력을 확보해뒀는지, 보증금이 5억 원 이하인지, 경ㆍ공매가 개시돼 다수 임차인이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는지, 임대인에게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으려는 고의가 있었는지 등 네 가지 요건이다. 그런데 그 중, 전세 사기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한 사례의 상당수가 ‘고의성’ 요건을 인정받지 못한다고 한다. 전세 사기 피해자로 인정받기 위해 넘어야 하는 ‘높다란 문턱’이었다. 현재 내가 살던 건물의 14명이 전세금을 못 받고 있다. 14명은 건물의 전체 세입자 수에 해당한다. 이 중 집주인의 ‘사기 의도’를 증명할 수 있는 이는 누가 있을까?

전세 사기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의 심정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됐다. 목마른 나그네가 겨우겨우 산 하나를 넘어 사막을 만난 꼴이었을 것이다. 억울함은 북받쳐 눈물을 이루고, 봇짐은 눈물을 머금고 무거워졌을 것이다. 잠시 평온을 되찾다가도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국 모든 잘못의 화살은 자신에게로 향했을 것이다. 그리고 끝끝내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신기루는 ‘죽음’이었을까.

그 집에 살기 전 나는 여름이면 손바닥만 한 바퀴벌레가 출몰하는 낡은 빌라에서 살았다. 그 집을 보러 갔을 땐 전부 새것인 점이 꼭 마음에 들었다. 창문이 양쪽에 있는 점도 좋았다. 열심히 발품을 판 끝에 만난 ‘행운’이라고 여겼다. 우연히 옆 건물에 고향 친구도 이사를 왔다. 믿음직한 이웃과 함께 앞으로 좋은 일만 생길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우린 어둠의 시간을 함께 걸어가고 있다. 함께하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했다. 그럼에도, 마침내 이 모든 상황이 잘 해결되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이제 기댈 곳은 ‘기도’밖에 없을 것 같다.

진보화 청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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