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수의 개념을 최초로 기록한 방식은 빈 터에 구슬을 여러 개 모아두기, 나무 막대기에 칼집을 여러 번 새기기, 큰 바위에 다른 돌로 긁은 자국을 내거나 물감으로 기록할 숫자만큼 표시를 해 두기, 새끼줄에 매듭을 여러 개 지어놓기 등으로 고고학에서 알려져 있다. 하나의 획으로 1을 나타내는 이러한 단항 기수법(單項記數法)은 10 내외의 수를 나타내기까지는 괜찮았으나 몇십의 범위로 넘어가면서 적고 읽는 피로감이 더해졌고, 인류가 더 효율적인 기수법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후 고안된 것이 1보다 큰 다른 수를 1획과는 다르게 그려서 나타내는 명수법(命數法)이다. 간단한 예로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한자 문화권에서 5를 묶어서 나타낼 때 바를 정(正)자를 쓰는 것을 들 수 있다. 영미권에서는 ||||에 사선을 하나 그은 모양, 유럽대륙과 중남미에서는 정사각형에 대각선을 그린 모양으로 나타내는데, 어려서부터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고 계산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오늘날 아라비아 숫자와 10진법이 전세계적으로 통용되기까지 다양한 명수법이 시도되었고 일부는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로마숫자에서 5를 V로 나타내고 10을 X로 나타내는 것, 주판에서 1을 나타내는 구슬과 5를 나타내는 구슬을 분리 배치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배치에서 영감을 얻은 듯, 1940년대에 우리나라 주산의 거목인 배성진 대한실업교육진흥회장이 고안한 지산법(指算法)은 아래 그림과 같이 엄지손가락으로 5 또는 50을 표현하여 두 손으로 0~99 사이의 정수를 각기 다르게 표시할 수 있다.

지산법은 종이와 필기구, 또는 기계식 계수기를 휴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0~99 사이의 수를 세고 기억하는 데 여전히 유용하다. 몇백까지 올라가더라도 100의 자리의 수만 머리로 기억하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에, 영화관에서 웬만한 규모의 관람실에 출입하는 사람 수는 두 손으로 세고 정확히 기억할 수도 있다. 가독성이 좋다고 할 수는 있지만 펴고 접는 손가락의 순서를 고려한다면 여전히 인간의 두 손이 나타낼 수 있는 수의 최대값인 2^10=1024에 도달했다고는 볼 수 없다. 여기서 펴고 접는 각각의 손가락이 서로 맞닿거나 포개어지는 것을 허용하면 아래 그림과 같이 표현 가능한 수를 9999까지 늘릴 수 있다. 이는 중세 유럽에서 사용되던 방법으로, 실제로는 대부분의 경우 100 이내의 숫자를 세는 일에만 사용되었다고 한다. 아래 야누스 신상 그림으로 볼 수 있듯, 특정 날짜를 1년 중 몇번째 날인지 표시할 때 사용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고대 수메르인들이 사용했던 60진법은 어떻게 나오게 된 것일까? 이는 60의 약수를 나열하여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일단 6 이하의 모든 자연수의 최소공배수라는 점은 간편하게 2, 3, 4, 5, 6등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유일하게 5로 나누었을 때 몫으로 5의 배수가 아닌 12를 얻는다. 이 12 또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다는 것을 아래 그림에서 알 수 있다. 한 손에서 엄지손가락 이외의 손가락들은 마디를 3개씩 갖고 있고, 합치면 12개의 마디가 된다. 따라서 각각의 마디에 반대편 손의 손가락을 하나씩 짚는 식으로 12가 몇 번 곱해졌는지 기억할 수 있으며, 짚는 손의 손가락 5개를 곱하면 60을 얻는다. 이러한 5와 12의 조합으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 단위, 각도 단위, 월(月) 단위가 정착되게 되었다.

수를 기록하고 다루는 능력은 인류의 인지적 한계를 극복하게 했다. 기억에 의존해야 했던 구술 문화에서는 수백, 수천의 값을 정확히 다루기 어려웠다. 숫자를 적어놓을 수 있게 되면서, 인간은 외부 기억장치를 얻은 셈이 되었고, 마음 속으로는 상상할 수 없던 거대한 수나 복잡한 계산도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확장된 인지는 과학 발전의 필수 조건이었다. 예컨대 천문학에서 천체 사이의 거리를 계산하거나, 역법을 예측하려면 엄청난 규모의 수를 다루어야 했지만, 기록된 숫자와 계산 알고리즘으로 이를 해낼 수 있었다. 인식론적으로 보면, 숫자 기록은 경험적 현실로부터 추상 개념을 도출하고, 그 개념을 다시 현실에 적용해 예측과 설계를 가능케 하는 지식 순환의 핵심이었다. 숫자를 기록함으로써 인간은 정량적 객관성을 얻었다고도 볼 수 있다. 말로만 전해지던 사실들이 숫자로 검증되고 표현되면서, 지식은 더욱 엄밀해지고 보편화될 수 있었다.
손가락에 의존한 원초적 셈에서 시작해 쐐기문자, 산가지, 로마 숫자, 그리고 인도-아라비아 숫자체계에 이르기까지, 수를 기록하는 기술의 진화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혁신 중 하나였다. 심지어 ‘자릿수’를 의미하는 영어단어 digit의 본래 의미도 ‘가락’(손가락, 발가락의 집합명사)이다. 각 문화권의 명수법은 그 사회의 경제 조직과 행정 제도, 교육 방식을 바꾸어놓았다. 수메르의 쐐기문자는 도시 문명의 성장을 뒷받침했고, 중국의 십진법 산술은 선진적인 학술과 행정을 가능케 했다. 로마의 숫자체계는 거대한 제국의 경영에 기여했지만 한계도 있었고, 이를 극복한 인도-아라비아 숫자체계의 도입은 중세 말 근대 유럽의 상업과 과학 혁명을 촉진했다. 나아가, 숫자를 기록하고 조작하는 능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추상적 사고의 영역을 넓히게 했고, 무(無)의 개념 수용 등 철학적 도약을 이끌었다. 사회사적 시각에서 볼 때 수 기록 기술은 사회 복잡성을 지탱하는 필수 도구였으며, 인식론적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우리의 사고 틀을 재구성한 지적인 도구였다. 오늘날 디지털(digital) 시대에 이르러 0과 1로 이루어진 이진수 체계까지 활용하고 있는 인간은, 선사시대에 손가락을 꼽아가며 수를 세기 시작한 이래 끝없는 수의 추상화 여정을 걸어온 셈이다. 그 여정이 만들어낸 수 기록의 역사는 곧 인류 문명의 또 다른 얼굴이며, “숫자로 세계를 이해하는” 현대인의 철학 역시 이 길고 다양한 역사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양창모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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