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정책 펀치가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60여개국에 수용 불가능한 관세가 부과됐다. 25%인 우리나라를 포함, 각국이 협상 테이블로 달려가고 있다. 이면에는 미국의 고질적인 쌍둥이 적자(재정·경상 적자)가 자리 잡고 있다. 1980년대 레이건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감세 정책과 국방비 증가로 재정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보전을 위해 국채를 발행하자 이자는 상승, 외자가 밀려들고 달러 가치도 상승했지만, 수출 경쟁력 약화로 무역수지는 증가했다. 급기야 G5 플라자 합의(1985)로 일본·독일의 화폐 절상을 관철했다. 일본은 버블 붕괴(1991)로 디플레이션의 수렁에 빠져 '잃어버린 20년'을 겪고도 10년이 지났다.
작금과 유사한 우격다짐은 1990년대 중후반 국제전화정산 부문에서도 있었다. 국제전화를 걸면 요금을 징수한 발신 사업자는 상대국 착신 사업자에 정산료를 지급한다. 정산료는 착발신수준이 같아 초과 통화 국 사업자는 그만큼 정산비를 상대에게 지급한다. 득이 되는 상대국은 정산료를 낮출 유인이 전혀 없다. 그래도 당시 국내 통신사는 일본·중국에 주는 정산료를 몇 푼이라도 깎아 보려고 뻔질나게 출장을 오가며 접대도 하고 선물도 주었다.
문제는 미국. 세계 각국으로 국제전화 초과 발신량(=수출량)이 워낙 많다 보니 정산비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트럼프 관세는 자국 경제 방어 차원에서 인상했지만, 정산료에 대해서는 너무 높다며 인하로 대응했다. 미 방송통신위원회(FCC)는 '원가지향 원칙'하에 세계 국가를 경제 수준에 따라 다섯 개 군으로 구분, 네트워크 원가를 국제접속·전송 및 국내 착신으로 삼 구분하여 추정, 일정 기간 내에 이에 도달하도록 강제하는 명령(order)을 내렸다.
기간통신사업자의 국제전화망을 대체할 수단이 없었기에 착신 망은 독점적일 수밖에 없고 시장이 성장하면 비용이 안정화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회 후생을 높이기 위해 정산료가 한계비용으로 수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경제 논리에 이의 제기는 없다. 문제는 FCC가 자국 통신사를 대상으로 내린 정산료 인하 명령이 협상 대상국 통신사의 이익까지 침해한다는 점이었다. 이는 사실상 관할권을 넘는 명백한 월권이었다.
다양한 국제기구(ITU·OECD·APT)에서 찬반의 격론이 반복됐고 그만큼 담당자였던 필자의 해외 출장도 늘 수밖에 없었다. 경탄한 것은 이구동성으로 반대하지만, 흐트러진 타 회원국과 달리 미국은 상무성을 대표로 타 정부 기구가 일사불란한 추진력을 보였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는 정산료 인하 기간을 1년 추가 유예하는 조건으로 정무적 타협을 했다.
20여년이 지나 변화는 명확하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메신저·통화기능이나 VoIP와 같이 국제전화를 대신해 주는 서비스가 사방에 널려있어 비용 걱정 없이 마음 편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정산료의 중요성도 떨어졌다. 팍스 아메리카의 쇠락도 명확하다. 국채로 빚내어 돈을 찍어내려면 미국경제 및 기축통화인 달러에 대한 믿음이 전제인데 해외 자금이 미국에서 이탈하면서 달러가 약세를 보이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10년을 주기로 변하는 세상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지만, 과거의 기록이 작금의 현명한 대응을 위한 실마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내찬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 nclee@hansu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