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은경, “일밖에 없던 나에게 필요한 영화”…‘여행과 나날’ 개봉

2025-12-10

적막한 일본의 도심. 한국인 각본가 ‘이’(심은경 역)가 어두운 방 안에서 연필을 쥐고, 한글로 각본을 써 내려간다. ‘S#1 여름 바닷가’라는 씬넘버 뒤로 시나리오가 이어지고, 화면은 제작된 영화로 전환된다. 한참 동안 여름날 일본의 시골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남녀의 이야기가 펼쳐지다가, 영화는 다시 한 대학 강의실에서 열린 GV 현장, 각본가 ‘이’와 감독의 모습을 비춘다.

영화에 대한 학생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나는 별로 재능이 없다”고 말하는 ‘이’에게 교수는 여행이라도 다녀오길 권한다. 슬럼프와 무기력함에 시달리던 ‘이’는 눈이 가득한 여행을 떠난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마주한 설국에서 그는 여러 사건을 겪게 된다. 10일 개봉한 미야케 쇼 감독의 영화 <여행과 나날>은 여행이라는 비일상적 순간에서 마주하는 소소한 행복을 통해 ‘이’가 점차 회복되는 모습을 담았다.

지난 5일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에서 만난 심은경(31)은 “시나리오를 읽던 중 ‘재능이 없는 것 같다’라는 이의 말에 확 몰입됐다”며 “매번 내가 느끼는 마음을 타인 앞에서 고백하는 ‘이’가 용기 있어 보여 꼭 연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저도 슬럼프에 빠졌었고, 아직 동굴 속에 있는 것 같지만 ‘이’를 연기하면서 내가 가진 고민이나 고독감에서 약간은 해방될 수 있었다”고도 했다.

영화 속 ‘이’는 심은경이 연기했던 그 어떤 역할보다도 담백하다. 그는 “시나리오를 읽고 연기적 여백이 중요하겠다고 생각했다”며 “마치 무성영화에서 연기 동작을 섬세하게 짜는 것처럼, 동작과 걸음 하나하나 감독과 세세하게 상의하며 촬영했다”고 말했다. 이어 “감독님에게 ‘(촬영할 때)되도록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고 말하니 그 말을 굉장히 기쁘게 들어주셨다”며 “항상 연기를 채우는 일에 집중했는데, 가만히 있어도 영화가 완성됐다는 경험이 큰 배움이자 발견이 됐다”고 했다.

영화는 비일상으로부터 회복되는 일상에 관한 이야기지만 이를 연기한 심은경은 정작 ‘비일상’은 커녕 여행 같은 취미도 없다고 말했다. “(취미나) 그런 게 전혀 없고 일밖에 생각을 안 해요. 저야말로 이 영화가 가장 필요한 사람이 아닐까 싶어요. 워낙 비일상에 대한 유연성이 떨어져서 이번 촬영으로 야마가타현에 갔던 것 자체가 비일상적 경험 같기도 합니다.”

<여행과 나날>은 일본의 만화가 쓰게 요시하루의 작품 <눈집의 벤조>와 <해변의 서경>을 섞었다. 각각 여름과 겨울을 배경으로 하는 두 이야기를 ‘극 중 극 구조’를 활용해 엮어냈다. <눈집의 벤씨>의 주인공은 중년의 일본인 남성이었지만, 심은경이 주연을 맡으며 영화 속 주인공은 젊은 한국인 여성이 됐다. 대사 대부분은 일본어지만, ‘이’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나레이션은 한국어로 진행된다.

영화를 만든 미야케 감독은 하마구치 류스케, 후카다 고지 등과 함께 일본 내에서 ‘젊은 거장’이라 불린다. 미야케 감독은 앞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각본을 쓰다 심은경 씨가 연기하면 좋을 것 같다고 문득 생각했다. 심은경을 만나 캐릭터가 완성된 것”이라며 “중요한 건 국적, 나이, 성별이 아닌 캐릭터의 마음을 표현하는 일이다”고 밝혔다.

여행을 떠나기 직전, ‘이’는 “나는 말이라는 틀에 갇혀있다. 말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토로한다. ‘이’가 언어를 벗어나 여행을 떠난 것처럼, 이 영화도 ‘말’이나 ‘대사’라는 틀에서 벗어나 화면 그 자체를 느껴보는 게 어떨까. <여행과 나날>은 올해 제78회 스위스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표범 상을 받았으며, 심은경은 일본 ‘닛칸스포츠영화제’와 ‘싱가포르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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