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 남녀 "유학 때 만났죠"…그게 새빨간 거짓말인 이유

2025-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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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류층 대상으로 결혼정보 업체를 운영하는 A씨. 그는 몇 년 전 유력 재벌가 사모님으로부터 특이한 맞선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의 손녀를 콕 찍어 “그 집안과 사돈을 맺고 싶다”는 연락이 온 것.

가끔 이렇게 특정 상대를 연결해 달라는 부탁을 받지만 실제로 만남이 성사되는 일은 많지 않다. 한쪽에서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지목’ 당한 집안에서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내로라하는 한 유통 대기업 집안의 딸은 빼어난 외모와 이력으로 상류층 결혼정보 업계에서 자주 언급됐다. 하지만 이 집안 역시 맞선을 꺼렸다. A씨는 “만남 자체가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그의 얘기다.

“정몽구 손녀 연결해 달라” 사모님 전화

“재계, 특히 3~4세대로 내려오는 집안은 전통 있는 기업인 집안과 인연 맺기를 가장 선호한다. 서로의 세계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요즘은 벤처 기업가나 금융 투자자 집안으로 시선이 넓어지고 있다. 확실한 건 재력이 가장 앞 순위라는 점이다.”

#2. “여자친구는 마음껏 사귀어도 좋다. 그러나 결혼(배우자 선택)을 날벼락처럼 해선 안 된다. 결혼은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다.”

벌써 40여 년 전의 일이다. 유력 부동산 기업 오너의 차남인 B씨는 대학 2학년이 될 무렵 부모에게 이런 ‘지침’을 받았다. 연애 결혼은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메시지였다. 그는 양가 부모가 ‘픽’한 대로 고위 공무원 집안의 네 살 연하 딸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의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가문과 가문의 결합…신중할 수밖에”

B씨는 자녀에게도 이런 생각을 대물림했다. “아들이 군에서 제대했을 때 ‘결혼은 우리 부부가 맺어줄 것’이라고 얘기했다. (아들이) 처음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고민해 보겠다’고 대답하더라. 실제로는 군말 없이 따랐다. 나도 40년 전 아버지께 ‘(결혼은)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라는 말을 들을 때 너무나 생소했다. 지나고 보니 맞는 말 같았다. 결혼은 가문의 질서 안에 편입되는 중요한 절차더라.”

그가 아버지 말에 공감하게 된 사연이 있었다. B씨는 한때 재계를 떠들썩하게 하게 했던 모 그룹 ‘형제의 난’에 얽힌 얘기를 꺼냈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며느리의 난’이 있었다는 얘기였다.

“당시 회장(시아버지)에게 큰며느리가 편지를 썼다고 하더라. ‘시동생이 회삿돈을 횡령했다’는 투서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랫동서에 대한 질투에서 비롯됐다고 하더라. 아랫동서는 이름만 대면 대한민국 사람 누구나 알 만한 집안의 딸이다. 첫째는 연애로 만나서 결혼했고, 처음엔 양가 모두 반대했었다. 호사가들이 쑥덕거리는 얘기일 수 있겠지만… 집안 간 유대의식이 있었다면 벌어질 수 없는 사건이다.”

예식 장소부터 하객 패션까지 화제 몰이

재벌가의 결혼은 일반인은 물론, 재벌가에서도 큰 관심거리다. 배우자가 아나운서나 배우 같은 유명인이라면 더 핫해진다. 이른바 ‘신데렐라 탄생’이다. 서로 사귀기 시작한 사연부터 프러포즈, 거리 데이트 등등 모든 로맨스가 두고두고 화제가 된다. 하객으로 ‘이웃 재벌가’가 참석하는 것도 그 자체로 뉴스다.

최근엔 2022년 6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장녀 진희씨 결혼식이 예식 장소와 배우자 가족, 하객, 패션 등에서 눈길을 끌었다. 결혼식을 올린 서울 정동제일교회는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과 정의선 회장 부부에 이어, 진희씨까지 3대(代)로 이어진 현대가(家)의 결혼 명소다. 하객으로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 주요 대기업 총수가 대거 참석했다.

10대 재벌, 100년 결혼사 들여다보니

재계 혼맥은 짧게 보면 50년, 길게 보면 100년쯤인 한국 재계사(史)와 궤를 같이한다. 재벌가는 혼맥과 혈연으로 부와 영향력을 확대했다. 결혼을 통해 정치 권력과 손잡고 특혜를 누렸다는 논란도 있다.

실제는 어떨까. 더중앙플러스는 삼성·SK·현대·LG·롯데 등 국내 10대 재벌 가문의 지난 100년간 혼인(재혼 포함) 남녀 275명을 분석했다. 그 결과 같은 재계 집안(대지주·중견기업·은행가 포함)과 사돈을 맺은 비율이 49.5%로 절반에 달했다. 최근 10여 년 새 재계-재계 간 결합 비중이 작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40%대였다.〈그래픽 참조〉 이를 통해 그들의 ‘1% 결혼’ 그물망은 더 탄탄해지고, 더 촘촘해졌다.

고 이병철·정주영 등 1세대 기업가가 창업 기지개를 켜던 1950년 이전에는 재계-재계 간 결합이 50%였다. 이런 추세는 꾸준히 이어지며 1990~2000년대 52.2%를 기록한다.

이를 통해 국내 재계의 양대 산맥인 삼성가와 현대가가 연결되기도 한다.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의 장남인 성민씨는 2021년 정몽석 현대종합금속 회장의 장녀 정은씨와 웨딩마치를 울렸다. 조성민씨는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의 외증손자, 정정은씨는 정주영 명예회장의 동생인 고 정순영 성우그룹 명예회장의 손녀다.

현대가는 또 외환위기 때 좌초한 대우그룹과도 인연을 맺는다. 정의선 회장의 큰사위인 김지호씨는 김덕중 전 교육부 장관의 손자다. 김 전 장관은 고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형이다.

이렇게 재계 간 결합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구자열 LS 이사회 의장의 장남인 구동휘 LS MnM 대표는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의 장녀 상민씨와 결혼했다. 이 밖에도 코오롱·세아·애경 등이 10대 가문 인사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는 “재벌들은 혼인 관계를 통해 서로 신뢰를 강화하고, 협업하기도 했다. 상생하는 구조가 생겨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재계 3·4세로 오면서도 어려서부터 사교 모임이나 해외 유학 등으로 엮이면서 ‘그들만의 리그’가 이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정관계와 결합 한때 28%…요즘은 ‘제로’

재계에서 일반 가정 출신과 혼사를 치르는 비율은 1950년 이전이 40%로 가장 높았다. 1970~80년대 9.9%로 낮아졌다가 최근 10년 새 26.2%로 상승하는 추세다. 네 쌍 중 한 쌍이 조금 넘는다. 이에 대해 20년 이상 경력을 가진 커플매니저 C씨는 “재벌 간 혼맥은 계속 얽히고 있다”며 “일부 집안에서 이를 꺼려 관계가 먼 상대를 찾기도 한다. 그래서 평범한 가정과 혼사에 관대해진 것일 수도 있다”고 풀이했다.

권력과 이권을 상징하는 정·관계와 결합은 1970~80년대가 피크였다. 이즈음 재벌가 혼사 10개 중 3개 가까이(28.1%)가 대통령·국무총리 같은 유력 집안과 이뤄졌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벽산·풍산그룹과 사돈 관계였다. 이 시기 고 구본무(LG), 구자열(LS), 허창수(GS), 김승연(한화), 고 조양호(한진), 박삼구(금호) 회장 등 주요 대기업 후계자들이 장·차관, 군인 집안 자제와 혼인했다. 이혼 소송 중인 최태원 SK 회장과 고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인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이 결혼한 건 1988년이다.

이들의 결합은 재계의 사업 구도, 권력 관계 등을 바꿔 놓기도 했다. 재벌을 중심으로 고속 성장이 이뤄지면서 저금리 차관 도입이나 사업 인허가 등에서 ‘보증 티켓’으로 정치 권력을 찾았고, 두 집안이 결속하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수단이 혼인이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재계-정관계 간 결혼 비율은 1990~2000년대 17.4%로 낮아졌다가 2010년대 들어 ‘제로’로 떨어졌다.

LG·금호는 주로 재계와, 현대는 일반인과

결혼 문화는 기업별로 색깔이 뚜렷하다. 삼성(51.6%)과 LG(62.2%), 롯데(68.4%), 금호(62.5%) 집안은 재계와 결합 비율이 절반 이상이다. LG와 금호는 자녀 수가 많고, 대기업과 사돈 맺는 사례도 잦아 ‘재계 혼맥의 축’으로 불린다.

현대(38.9%)와 한화(42.9%), 두산(40%) 집안의 자제 10명 중 4명가량이 일반 가정 출신과 맺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자유 연애와 결혼을 존중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은 입사 동기와 장기간 연애 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비공개 결혼식을 치렀다. 그의 사촌 동생인 김동환 빙그레 사장도 사내 연애로 시작해 결혼에 골인했다. SK는 학계·의료계·법조계와 결혼한 비율이 21.1%로 다른 그룹보다 높았다.

한화(42.9%)는 한진(40%)과 함께 정관계 쪽과 결혼 비율이 높았다. 이는 그룹의 주력 업종과도 관련이 있다. 이경묵 교수는 “과거에는 정부가 기업이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의사결정을 했다”며 “한진(대한항공)은 새 항로를 여는 데, 한화는 군수 물자를 공급하는 데 대정부 관계가 중요했다. 이 과정에서 집안 간 혼사로 엮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남자 쪽은 외모, 여자 쪽이 더 까다로워”

이 같은 재계 혼맥 분석에 대한 김현중 퍼플스 대표의 해석이 흥미롭다. 퍼플스는 김 대표가 2001년 창업한 상류층 전용 결혼정보회사다.

“과거에는 권력을 가진 정치인 집안과 재벌들이 사돈 맺고, 특혜를 받아 초고속 성장하는 사례가 꽤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재벌들은 정치인에게 메리트를 느끼지 못한다. 되레 정치와 엮이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한다. 법조나 의료, 학계 같은 전문직에도 큰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퍼플스 같은 상류층 결혼정보 회사나 이른바 ‘마담뚜’를 찾는 예비 혼주는 어떤 사람들일까. 김 대표의 이어지는 설명이다. “주로 지인 소개로 회사를 찾아온다. 십중팔구 어머니 쪽에서 연락한다. 기업 비서실에서 ‘출장 와 달라’고 하지만 이건 아주 드문 사례다. 분명한 건 쌍방이 사전에 서로 오케이 했을 때라야 맞선을 본다는 사실이다. 각각에게서 만남을 허락(?)받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다.”

대기업 집안은 대개 비슷한 규모의 상대방을 선호하지만, 이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남성 쪽에서는 여성의 외모를 상대적으로 우선시한다. 재벌가 여성 쪽은 상대를 고르는 조건이 대체로 더 까다롭다. 어떨 땐 ‘아이비리그 중에서도 하버드대 출신’ ‘집안 자산 1조원 이상’ 등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내놓으면서 좋은 후보자감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한다.

“해외 유학 중 만났다” 대부분 거짓말

여기서 검증 과정을 거친다. 예비 신랑·신부의 과거 이력과 평판 등을 확인하는 것이다. 다시 결혼정보 업체 A씨의 얘기다. “학교 다닐 때 소문, 가까운 친구 등을 크로스로 검증한다. 여기서 잘못됐다간 크게 사고가 날 수 있다. 실제로 남성 쪽이 미국에서 유학 중 마약을 했던 이력이 드러나 거의 다 된 혼사가 엎어진 적이 있다.”

결혼을 외부, 특히 언론에 공개하는 것도 ‘기술’이다. 김현중 대표는 “결혼에 즈음해 ‘신랑·신부가 유학 시절 만났다’고 하면 대개는 거짓말”이라고 귀띔했다. 상대 집안과 자녀에 대해 이중삼중으로 체크하고, 충분히 교제한 다음 결혼식에 이르러서야 ‘유학 중 연애’로 포장한다는 얘기다.

요약하면 재계의 혼사는 ▶일찌감치 자녀들에게 집안의 전통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거쳐 은밀한 검증을 거친다는 것, 그리고 ▶오너 3·4세로 갈수록 어려서부터 교류가 늘면서 자연스럽게 교제도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김 대표와 A씨, C매니저가 공통으로 하는 말이 있다. “점점 상대를 구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결혼 후보감으로 재계 출신 자녀를 찾는 게 1순위다. 더 은밀하게.” 문이 넓어졌지만 문턱은 높다는 얘기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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