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고에는 골프용품으로 가득했다. 거실은 임성재·김시우·이경훈 등 여러 골프 선수들의 캐디백 등으로 빼곡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인근 엔시니타스의 해리티지 언덕에 자리한 이 집은 그야말로 골프로 가득찼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 진출을 꿈꾼 한국 선수들 중 상당수는 이 집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집주인은 재미교포 램버트 심(57·한국명 심원석) 씨다. 그의 집은 미국 ‘골프 빅리그’ 진출을 꿈꾸는 선수들에게 등대 같은 존재였다. 그가 켠 ‘등대 불빛’을 따라간 선수들의 성공 확률은 놀라울 정도로 높았다. 그는 지난 20여 년간 대가를 받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한국 선수들을 도우며 ‘숨은 큰 형’ 역할을 해왔다.
서울 경기고와 미국 미시간대를 졸업한 심 씨는 미시간대 의과대학에 진학했지만 사정상 학업을 끝내지 못하고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 정착했다. 주식 등으로 돈을 벌었고, 호텔과 골프연습장을 인수하면서 사업 규모를 늘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우연히 한국 골프 꿈나무들을 만나게 됐다. “처음엔 미국 생활이 낯선 선수들이 안쓰러워 방을 내준 것이 전부였다”는 그의 말처럼 시작은 소박했다.

2004년, 국가대표 고교생이던 최나연과 윤채영이 심 씨 집 인근에서 열린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미국을 찾았을 때 그는 자신의 집을 내주며 숙식을 도왔다. 두 선수는 낯선 환경에도 불구하고 월드 주니어 대회에서 팀 우승을 차지했고, 최나연은 귀국 후 고교생 신분으로 KLPGA 대회에서 우승했다.
이때부터 심 씨의 집은 한국 선수들의 미국 진출 베이스캠프가 됐다. 이듬해 그는 뉴질랜드 교포 대니 리(한국명 이진명)를 위해 US 주니어 아마추어 대회 등에 동행했다. 장하나·김대현·홍순상·김인경 등도 전지훈련과 대회 참가를 위해 그의 집에 머물렀다.
그 방에 머문 뒤 유난히 우승하는 선수가 많아지자 선수들 사이에 소문이 퍼졌다. 심 씨는 “이곳에서 전지훈련한 선수들의 이듬해 우승을 모두 합치면 50승도 넘을 것”이라며 “이 방을 ‘챔피언스 룸’이라 불러도 될 것 같다”고 웃었다.

특히 PGA 투어에 진출한 선수들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이경훈·노승열·김시우·임성재·대니 리 등의 미국 무대 안착을 그가 도왔다. 2013년 김시우가 PGA 투어 Q스쿨을 통과할 때도, 임성재가 2019년 신인왕을 차지할 때도, 2023년 이경훈이 더CJ컵 바이런 넬슨에서 2연속 우승을 거둘 때도 그가 곁에 있었다.
영어가 유창한 김주형·안병훈을 제외하면 2010년 이후 PGA 투어에 진출한 한국 선수 대부분이 그의 도움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김시우·임성재·대니 리의 로드 매니저나 캐디를 직접 맡았다. “뉴질랜드 총리와 이명박 대통령의 파티에 초대됐다가 경호원의 총에 맞을 뻔한 적도 있고, 치안이 좋지 않은 남아공에서 가방을 잃어버려 한 달간 속옷을 사지 못해 매일 빨아 입었던 일도 있다. 스코틀랜드에서 렌트한 경유차에 휘발유를 넣었다가 차가 고장 나는 등 고생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그는 회상했다.
심 씨는 여행경비 절약과 10대였던 선수 관리 등의 문제로 같은 방을 썼다. 그는 “선수들이 깰까 봐 밤에 화장실에 갈 때는 기어서 다니기도 했다. 침대가 하나뿐일 때는 늘 내가 소파에서 잤고, 그게 습관이 돼 지금도 소파가 침대보다 더 편하다”고 했다.

그는 전문적인 매니지먼트 회사 등을 만들지 않고 순수한 팬으로 남았다. 심 씨는 요즘도 한 시즌에 10경기 정도 대회장에 직접 찾아가 응원한다. 콘페리 투어에 있는 노승열과 LIV로 간 대니 리와는 자주 통화한다.
심 씨는 “고관절로 정말 아픈데도 아픈지도 모르고 연습만 한 이경훈이 가장 성실한 선수였다. 감각과 멘털이 가장 좋은 선수는 임성재이며, 아이언을 가장 잘 친 선수는 김시우였고, 가장 천재적인 선수는 대니 리였다”고 기억했다.
그는 골프 치는 걸 그리 즐기지 않는다. 골프를 좋아한다기보다는 PGA 투어에 한국 선수를 정착시키는 걸 보람으로 여기는 듯하다. 그는 또 PGA 투어에서 활동하던 유능한 캐디들을 LPGA 투어 한국 선수들에게 소개해 LPGA 투어의 수준을 끌어올렸다는 평가도 받는다.
심 씨는 “PGA 투어 진출을 원한다면 가능한 많은 해외 대회에 참석해 각기 다른 잔디를 경험하고 적응해야 한다. 지금 PGA 대회에 뛰거나 뛰었던 선수들은 10대 후반부터 각 나라의 내셔널 대회에 출전하고 여러 투어의 Q스쿨에 도전했다”고 말했다.
국내 대회에서 캐디백을 멘 일도 많다. PGA 투어 선수와 KPGA 선수의 차이는 매주 경기를 해서 실력을 쌓느냐 여부와 쇼트게임 실력 차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심 씨는 “PGA 투어 선수들은 주니어 시절 거의 50%를 쇼트게임에 할애한다. 한국 선수들은 그냥 매트에서 연습한다. 이건 잔디 구장에서 자란 축구 선수와 맨땅에서 연습하는 선수와의 차이”라고 했다.

예의 등 대인관계에 대한 교육도 잘 받아야 하고 골프 규칙도 숙지해야 한다. 골프 룰을 잘 이용할 수 있어야 큰 선수가 될 수 있다.
심 씨는 “장타 선수들보다는 우드나 롱아이언을 잘 치는 선수들이 오래 살아남는다. 장타를 치려고 스윙을 바꾸다 사라지는 선수가 많다. 원래 장타자들은 그걸 잘 유지하면 살아남지만, 상대적으로 다치는 일이 많고 거리가 줄면 빨리 사라진다. 우승을 많이 하려면 장타를 쳐야 하지만 오랫동안 살아남으려면 롱아이언을 잘 쳐야 한다. 임성재가 롱런할 수 있는 이유도 우드나 롱아이언을 정말 잘 치기 때문”이라고 했다.
PGA 투어에 가려면 국내 협회의 지원도 필요하다. 그는 “호주 선수들은 국가대표로 선발되면 협회가 매년 여름 전 세계에서 열리는 아마추어 대회에 참가하도록 지원한다. 반대로 호주 출신 PGA 투어 선수들은 아마추어 때 그런 지원들을 많이 받아서인지 호주 오픈 등 호주 국내 대회 등에 많이 나가는 것 같다”고 했다.
심 씨는 “우리 집을 거쳐 간 선수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챔피언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하다”며 “앞으로도 도움이 필요한 유망주가 있다면 흔쾌히 방을 내주고 노하우를 전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요즘 그는 ‘몬스터 샤프트’와 원조 ‘제로토크 퍼터’로 알려진 이븐롤 퍼터 관련 사업에도 관여하면서 여전히 골프와 함께 살고 있다. 심원석 대표는 “골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훌륭한 선수들과 함께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여행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배웠다. 그러면서 그들의 성실함을 목격했고, 함께 어려움을 겪었고, 세계적인 선수로 자라는 걸 지켜봤다. 그 순간 함께 있었던 게 영광이었다. 그들에게 항상 감사한다”고 말했다.
한국 투어도 개방해야 선수들이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심 씨는 “KPGA나 KLPGA도 소속 선수가 메이저 대회에 참가해 성적을 내면 포인트를 줘야 한다. 전 세계 투어가 메이저 대회를 토너먼트 스케줄에 포함시키는데 한국 투어만 안 넣는 것 같다. 아마추어 국가대표도 세계 랭킹 포인트로 뽑아야 한다”고 말했다.
성호준 골프전문기자
sung.hoj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