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시간에

2025-01-22

춘포, 한글로 풀이하면 봄개, 봄 나루라는 뜻이다. ‘봉개’라고도 불린다. 시간에 돌의 모서리가 닳는 것처럼 사람의 말도 부드럽게 닳아져 ‘봄’이 ‘봉’이 되었다. 봄이 지나는 길, 혹은 얼었던 강물이 녹아 봄이 되어야 물길이 열리기에 봄개라고 한다. 바닷물이 들어오던 나루터, 춘포에는 평야와 만경강, 뱃길이 있다. 풍요의 흔적이자 일제강점기에 겪었던 수탈의 현장이기도 하다. 일본으로 보낼 쌀을 실어 나르던 간이역이 그 증인이다. 지금은 폐역이 됐다. 뱃길은 닫혔고, 봉개는 잊힌 이름이 됐다.

나는 춘포에 산다. 동네 어르신들은 나를 ‘마을 끝에서 프랑스 남자와 살면서 개를 끌고 다니는 여자’라고 부르신다. 인디언식 이름을 연상시키는 이 표현이 다소 투박하기는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나’라는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과 내가 살아가는 장소만큼 중요한 게 있겠는가.

처음 춘포에 왔을 때,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낡고 오래된 집들과 그 집주인들이 정성스레 가꾼 마당이었다. 닳고 기울어졌으나 정성과 온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특히 집마다 한두 그루씩 심어 놓은 사과나무가 인상적이었는데, 소담하게 열린 열매들이 마치 비밀스러운 풍요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꼭 여기서 살고 싶다는 욕심이 앞섰지만, 시골살이가 녹록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사계절을 지켜보며 기다렸다. 화사하게 꽃 피는 시간도 삭막하게 시드는 시간도 모두 보고 싶었다. 그렇게 기다림 끝에 내 집을 갖게 됐다. 물론 살다 보니 이곳도 여느 시골 마을처럼 인구의 고령화, 노동인구의 감소 문제를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겨울철이 되면 더 염려되는 낡은 시설과 쇠사슬에 묶인 동네 개들을 볼 때면 봄이 오는 길이 영영 닫힌 것만 같다. 물과 시간은 거슬러 올라갈 수 없고, 쇠퇴와 소멸을 향해 가는 작은 마을의 운명 역시 막을 길 없다는 것도 알게 됐다. 하지만 사과나무를 가꾸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아직 남은 것들과 저무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믿게 된다. 느린 성장을 말하는 시대에 쇠락은 어떠한지 묻고 싶다. 아름답게 저무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고, 너무 빨리 새것으로 탈바꿈하거나 방치하거나 지워버리는 것은 아닌지.

춘포는 일몰이 아름다운 곳이다. 지는 해를 향해 걷다 보면 저무는 태양의 빛이 일출만큼 선명하고 붉다는 것과 생각보다 해가 천천히 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루의 실망과 후회가 안도와 감사로 바뀌는 시간에 이 오래된 마을은 일출의 힘찬 포부와 기대 대신 하루만큼 부드럽게 닳아진 희망을 조심스레 건넨다.

농경 사회에 번영했던 한 마을이 저무는 것처럼 우리의 생도 크고 작은 성장과 번영을 지나 쇠락의 시간을 맞이한다. 하지만 저무는 게 꼭 슬프고 안타까운 일만은 아니다. 일몰의 아름다움을 안다면, 우린 다가오는 어둠을 두려워하거나 내일을 재촉하기보다 잠시 머물며 가라앉는 빛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천천히 아름답게 저무는 일을 배울 수 있다.

일몰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기억하려 애쓴다. 기억은 소멸에 맞서는 가장 큰 무기이니까. 물론 그것은 언젠가 마주하게 될 나의 미래에게 건네는 다정한 인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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