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판화박물관장 “세계 단 2점, 중국 양귀비 ‘미인도’ 경매로 입수”

2025-04-23

물결 치는 비단옷을 입은 귀부인이 고개를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자 양 옆의 궁녀가 부축하고 있다. 한 궁녀가 왼손에 든 등(燈) 안에선 빨간 촛불이 일렁인다. 귀부인은 중국 미인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당나라 현종(玄宗)의 후궁 양귀비(719~756). 현종이 처소에 오지 않는다는 소식에 화가 나서 술에 취한 모습을 그린 판화다. ‘취주귀비도’라 불리는 이 작품은 청나라 건륭기(1736~1795) 유명 판화 생산지인 중국 쑤저우(蘇州)의 타오화우(桃花塢)에서 제작됐다.

“중국 양귀비를 담은 ‘미인도’ 판화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에 속합니다. 현재까지 단 2점 전해지는데, 상태가 더 좋은 걸 지난 3월 일본 야후 온라인경매를 통해 입수했어요.”

강원도 원주 명주사 주지이자 고판화박물관을 운영하는 한선학(69) 관장이 23일 서울 인사동 한 식당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취주귀비도’를 비롯한 미공개 판화 14점을 공개했다. 작품 크기가 가로 49㎝, 세로 77.5㎝인 ‘취주귀비도’는 일본풍 족자로 장황된 모습이다. 한 관장은 “일본 소장자가 고미술상에 넘긴 것이 경매에 뜬 것”이라며 “『중국목판년화집성』 등 유명 판화 전집에서 눈에 익은 작품이라 치열하게 응찰했다. 낙찰가를 밝힐 순 없지만 1억원은 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 관장에 따르면 또 다른 ‘취주귀비도’ 1점은 일본 개인이 소장 중이며 국내에 소개된 바 없다.

건륭시대 쑤저우 목판 연화(年畫·정초에 대문 혹은 집안에 거는 그림)는 정교한 그림체와 화려한 색감으로 유명하며 일본 목판화 우키요에(浮世絵)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귀비는 연화의 단골 소재였고 특히 술 취한 양귀비 일화가 인기를 끌었지만 전하는 작품이 거의 없다고 한다. 한 관장은 “간송미술관 소장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에 필적할 작품이자, 고판화박물관이 소장한 6500여점 중에 열손가락 안에 꼽힐 명품”이라고 소개했다.

이 밖에도 지난 2월 경매를 통해 일본에서 들여온 ‘만자 보협인다라니 판목’(조선 17세기)과 중국 원말 명초(15세기)에 제작된 ‘구품왕생도 대형불화판화’ 등 희귀한 유물들이 공개됐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을 삽화 형태로 그린 당대 그림엽서도 국내 처음 입수해 공개했다. 현재는 불타 없어진 내금강 장안사를 일본의 유명 목판화가 히라츠카 운이치(平塚運一)가 판화로 제작해 1937년 일본 국전에 출품한 작품도 나왔다.

이들을 비롯해 고판화박물관 소장품 가운데 그간 공개되지 않았던 유물들 50여점을 묶어 개관 22주년 기념전도 연다. ‘동아시아 미공개 고판화 명품 특별전’이라는 이름으로 5월1일부터 8월31일까지 원주 치악산 기슭의 고판화박물관에서 열린다.

40년간 목판·고서·판화 등을 모아 2003년 고판화박물관을 개관한 한 관장은 국내 최고 고판화 전문가로 2010년 한양대에서 박물관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코로나19 이후 관객이 많이 줄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되는 명품들을 통해 많은 분들이 고판화의 매력을 알고 박물관이 지속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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