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이 죽음들을 외면할 것인가

2025-07-30

수년째 취재연습이라는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첫 주에는 항상 자신이 태어난 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사 검색 과제를 내준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20여 년 전, 생이 시작되었지만 지각하지는 못했던 세상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 한 학생이 자신이 태어난 바로 그 날 죽은 한 청년에 주목했다. 전신주에 매달려 배선 작업을 하던 중 감전사로 죽었다. 등록금을 벌기 위해 일을 나선 첫날 벌어진 일이었다. 그날 죽지 않았더라면 어떤 삶을 살았으려나. 그때 번 돈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지금 그 시절을 떠올리면, 전신주에 올라 힘들게 돈을 벌던 시간이 아니라, 거리 응원을 다니던 월드컵의 열기를 이야기했을지도 모를, 보통의 삶.

잇따른 공장 노동자 사망 사고

유리벽에 부딪친 새들의 사체

우리 욕심과 무관심이 큰 원인

죽음 막는 노력 당장 시작해야

청년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던 그 학생은, 같은 시간 어딘가에서 다른 생명이 태어난 걸 그가 알았다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기도 했을까 생각했다. 죽음을 대신할 삶이 어디 있겠냐마는,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다 보니 본인이 좀 더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소중한 마음을 어찌하면 소설로 확장시킬 수 있을까 궁리를 하다가, 결국 우리는 최근에 일어난 공장 노동자 사망 사고에까지 다다랐다. 시대가 바뀌었어도 여전히 빈번하게 일어나는 작업장 사고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애도의 방식에 대해. 수업을 하는 내내 손목이 시큰거렸다.

한 공장에서 20대 여성 근로자가 사망했다. 1년도 채 되지 않아 계열 공장에서 50대 여성 근로자가, 그리고 몇 달 안 되어 또다시 사망 사고가 났다. 소스 배합기에, 반죽 기계에,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목숨을 잃었다. 기계에 손가락이 골절되거나 절단된 사고도 수차례. 최근 3년 동안의 일이다. 불매운동이 일어나고 여론이 들끓기도 했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다시 사고 소식이 들리면, 사람들 입에서 또야? 라는 말이 함부로 튀어나왔다. 또야? 안타까움을 넘어 공포와 좌절.

그 죽음에 관해 나는 무얼 했나? 고작 다짐뿐이었다. 피 묻은 기계로 만든 빵은 먹지 않겠다. 선언도 행동도 아닌 외면. 소비하지 않는 것으로 최소한의 양심은 지켰노라, 한 개인이 뭘 더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머리가 분주히 핑계를 대며 도망치는 사이, 내 정직한 몸이 대신 책임을 끌어안았다.

지하철역을 나오면 모퉁이에 그 공장에서 만든 빵집이 있다. 집으로 가려면 반드시 그곳을 지나쳐야 하는데, 간판을 보는 순간 손목이 시큰거리기 시작한다. 날카로운 기계음과 비명 소리 같은 것이 들리기도. 갓 구운 빵 냄새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손목에서 시작된 통증은 팔꿈치로 견갑골을 지나 목 뒤까지 이어진다.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몸의 반응.

이와 같은 몸의 통증을 캠퍼스 건물 유리벽에서도 느꼈다. 서울 건축대상 프랑스 건축가협회 그랑프리에 빛나는 아름다운 복합 공간. 비가 온 터라 바닥에 물이 고여 하늘과 구름이 비쳤다. 그리고 새가 있었다. 하나도 아니고 둘. 하늘을 나는 새가 아니라 죽은 새의 사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람들이 츳츳 혀를 차며 지나갔다. 기겁하며 도망치는 이도 있었다. 누군가 또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또야? 손가락 마디마디가 저려왔다.

자연활동 공유 플랫폼 ‘네이처링’에 기록 보고된 조류 충돌 발생 현황을 보면, 그 건물에서만 수백 개가 겹겹이 찍혀 있다. 자연과 연결된 열린 복합공간이라 자랑하던 그곳은, 새들에게는 그래서 더 맞춤으로 덫이며 함정이었고, 거대한 무덤이 되었다.

새의 죽음보다 더 충격을 받은 것은 유리창에 찍힌 자국이었다. 희고 투명한 그 형상을 무어라 할 수 있을까. 흡사 심령사진처럼 어렴풋이 빛나는 죽음의 윤곽. 활짝 편 날개와 유선형의 가슴과 몸통, 날개깃 하나 깃털 한 올 한 올이 극사실주의 세필화로 새겨진, 얼마나 빠르게 얼마나 세게 부딪쳤는지 고스란히 간직한, 사건 현장 사진.

유리 구조물에 충돌해 죽는 새의 수는 한 해 800만 마리에 이른다. 너무 투명해서 퍽, 반사된 풍경이 진짜 같아서 퍽. 하루 2만 마리의 새가 건물 유리벽과 투명방음벽 아파트 유리창에 목숨을 잃는다. 참새 비둘기 오목눈이 벙어리뻐꾸기 노랑눈썹솔새 노랑텃멧새. 지금도 똑딱똑딱 4초마다 한 마리 새가 퍽퍽.

모든 생명체는 언젠가 죽는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과 무심함으로 죽음에 이르게 해서는 안 된다. 근무 환경을 바꾸는 것으로 한 노동자의 죽음을 막을 수 있다면. 조류충돌 방지 테이프를 붙이는 것으로 새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다면. 통유리창 건물 안에 앉아 바깥 풍경 참 근사하다 하는 동안, 소비하지 않는 것으로 되었다 퉁 치고 돌아서는 그 순간. 죽지 않아도 될 생명이 죽어가고 있음을 진정 몰랐다 하겠는가. 우리는 서로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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