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정치

2025-12-12

“형사들한텐 그냥 ‘형님’이라고 불러.” 수습기자로서 경찰서를 돌며 사건을 캐는 교육을 받기 시작한 무렵 모 언론사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딱딱한 경찰들을 대하는 팁이라며 조언을 해준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인생에 ‘형님’이라는 존재가 없는 나는 이 말이 좀처럼 입에 달라붙지 않았다. 무언의 단독기사 압박을 느껴서인지 이 호칭을 몇 번 입에 올려봤으나 이내 포기했다. 당직을 서는 형사들에게 다가가 “형님 간밤에 무슨 일 없었어요?” 묻는 수습기자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남성 중심의 경직된 조직에서 네트워크를 쌓기 위한 일종의 위장술이자 의연해 보이려는 자기 주문과도 같았다.

기업에서 일할 당시엔 연차가 꽤 나는 상사를 사석에서 ‘형’이라고 부르는 남성 동료들을 적잖게 봤다. 이름에 ‘님’ 호칭을 붙여 서로를 부르는 게 이 기업의 문화로 공유됐지만 사실상 대외용이었다. 인사 시즌이면 몇몇 형이 가까운 아우들을 경쟁이 치열한 부서에 밀어준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형님 세계’를 곳곳에서 마주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유구한 역사를 지니니 새삼스러울 게 없다는 표현이 더 적확할 것이다. 대다수는 개인의 능력을 요령껏 발휘하면 기회가 주어진다는 믿음을 놓지 않고 산다.

문진석 더불어민주당 원내운영수석부대표가 지난 12월 2일 당시 김남국 대통령실 국민디지털소통비서관에게 대학 동문을 민간 협회장에 인사 청탁하는 메시지를 보내는 모습이 취재진에 포착됐다. “아우가 추천 좀 해줘”, “네, 형님. 훈식이 형이랑 현지 누나한테 추천할게요” 등의 문자가 오갔다. 이후 여당에선 “형, 누나 부르는 것은 민주당의 언어 풍토”(박지원 의원)라는 말까지 나왔다. 김병기 원내대표는 문 수석에게 엄중 경고했다면서도 사실상 그를 재신임했다. 아우에게 부적절한 요청을 하다가 발각된 형을 또 다른 ‘형’이 면책해준 모양새다.

성추행 혐의로 피소된 장경태 민주당 의원의 국회에서의 ‘자기변호’와 그를 두둔하는 의원들은 또 어떠한가. 지난 12월 3일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에서 국민의힘이 장 의원의 사임을 촉구하자 몇몇 범여권 의원은 그를 감싸는 과정에서 2차 가해성 발언을 했다. 배경엔 성인지감수성 결여, 권력형 성폭력의 특성 등이 다층적으로 얽혀 있지만, 2차 가해를 하는 정치인이 남·여를 가리지 않는 건 ‘형님 문화’의 답습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남성의 허물을 일정 부분 눈감아줘야 기득권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경험칙인 것이다. 당내 젠더폭력에 목소리를 낸 여성 정치인들이 조직적 비토에 밀려나는 모습을 우리는 수차례 보아왔다.

책임 있는 여당으로서 민주당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민주당의 언어 풍토”가 아닌, 공정성을 잃은 “이너서클 풍토”를 반성한다는 메시지를 내야 한다. 일부 의원들은 물론 부대변인, 보좌진까지 장 의원 사건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2차 가해를 한다는 비판이 나오지만, 민주당은 이를 제지하지 않고 있다. “수사 중”이라며 지도부가 말을 아끼는 근저에는 아우를 감싸주고 싶은 형님들의 온정주의가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때다. 형님 세계에 갇힌 정치는 어디까지나 그들만의 전유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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