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만난세상] 숙의 민주주의도 곳간서 난다

2025-10-09

“독일은 더 이상 정치 선진국이 아닙니다.”

지난달 베를린에서 만난 위르겐 마이어 전 녹색당 의원에게 독일 민주주의 시스템의 강점을 묻자 돌아온 답이다. 그는 “10년 전이었다면 그 질문에 할 말이 많았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한때 민주주의를 세계 곳곳에 전하던 그는 1980년대 독일 녹색당 국제담당 최고위원으로 활동하며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1987년에 해외에서 민주화를 위해 싸우던 교민들을 지원했고, 1988년 서울 평화대회에 참석했다가 강제 추방되기도 했다.

대한민국 민주화의 태동기부터 30년 넘게 한국을 지켜봐 온 그가 “현재 한국의 경제 사정이 독일보다 낫다”며 “그래서 한국은 정치 양극화를 회복할 여지가 더 크다”고 전망했다.

하지만 그 여지가 독일보다 월등하게 크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한국 역시 독일처럼 제조업 중심 경제 구조를 갖고 있고, 미국의 관세 압박과 환율 급등, 글로벌 공급망 재편 등 경제적 불확실성에 직면해 있다. 독일이 겪고 있는 경기 침체와 그로 인한 정치 양극화는 한국에도 닥친 문제다.

마이어 전 의원의 진단이 무겁게 다가오는 이유는 독일이 오랫동안 ‘숙의 민주주의’의 교과서였기 때문이다. 독일의 분권화된 연방 시스템은 중앙정부가 모든 권한을 쥐고 있지 않다. 정당 간의 조율과 타협 없이는 법 하나 만들기조차 어렵다. 나치 정권 때 중앙집권을 반성한 결과이다. 이처럼 정치의 본질을 조정과 협상으로 바라본 독일은 비례대표 중심 선거제로 중소 정당이 꾸준히 의회에 진입하게 했고, 그 덕에 다양한 가치와 소수 의견도 공존할 수 있었다.

지난 10년, 독일 경제가 급속히 악화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2014년 2.2%였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023년 -0.3%, 2024년엔 -0.2%로 두 해 연속 역성장을 기록했다. 산업 경쟁력은 흔들리고, 에너지 전환과 난민 문제는 재정 부담으로 이어졌다. 경제가 위태로워지자 독일 정치의 미덕이던 ‘숙의’와 ‘합의’는 오히려 신속한 대응을 가로막는 족쇄가 됐다.

조급해진 민심은 타협보다 빠르고 강력한 해결책을 원했다. 그 틈을 파고든 것이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었다. 올해 총선에서 AfD는 전국 2위 정당으로 급부상했고, 동독 지역에선 극좌 세력까지 세를 넓히며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이는 제도도 경제 기반 위에서만 힘을 발휘한다는 걸 보여준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다론 아제모을루와 제임스 로빈슨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포용적 제도가 경제 발전을 이끈다”고 썼지만, 독일 사례가 말해주듯 포용적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경제적 안정이 뒷받침돼야 한다. 두 학자도 11년 전 독일어판 서문에서 “경기 침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좌우 포퓰리스트의 부상을 불러올 것”이라 경고한 바 있다.

지금 한국이 배워야 할 것은 독일의 제도가 아닌, 독일이 직면한 한계다. 경제적 안정 없이는 아무리 견고한 민주주의 제도도 포퓰리즘의 공격 앞에 무너질 수 있다는 교훈 말이다. 나라의 형편이 넉넉해야 숙의와 합의가 민주주의의 미덕으로 작동한다. 빈 곳간으로는 우리가 꿈꾸는 민주주의도 지킬 수 없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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