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만 해도 피로한 많이 ‘사는’ 삶…적게 사는 모습이 아름답다

2025-03-26

배우 옥자연 간소한 생활 방식

‘자연주의’로 시청자 호평받아

맥시멀리스트 연예인과 대비

시청자 구매 욕구 자극 대신

‘낭비 지양하는 소비’ 장면 필요

5년 쓴 무선 이어폰에서 배터리 열화 알림이 떴다. 수리하러 갔더니 배터리 일체형 제품은 분해할 수 없단다. 거금을 주고 샀던 무선 이어폰은 그렇게 허무하게 내 곁을 떠났다. 스마트 워치나 휴대전화를 고치러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서비스센터에서는 제품 가격과 맞먹는 수리 가격을 부르며 ‘차라리 새 제품을 사라’고 권했다. 계절이 바뀌면 옷장 정리를 한다. 멀쩡하지만 유행이 지났다는 이유로 입을 수 없는 옷들이 헌옷수거함 101 오디션에 진출한다. 중고로 처분할까 해서 당근마켓을 켜면, 한 번도 안 입었다는 새 옷들이 매물로 뜬다. 인스타그램에 들어가자, 방금 검색했던 물건들의 광고가 뜬다. 지금 들어온 이 창을 닫으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비밀링크의 할인가란다. 유튜브에서는 연예인들이 앞다퉈 좋은 물건, 신제품을 자랑하며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소비의, 소비를 위한, 소비에 의한 일상은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지난 2월14일 MBC 관찰 예능 <나 혼자 산다>(이하 나혼산) 583화에 출연한 배우 옥자연은 이렇게 소비주의로 물든 미디어 수면에 조그만 돌멩이 하나를 던졌다.

옥자연의 소소한 일상이 특별한 이유는 이전까지 관찰 예능에서 조명했던 극단적인 삶과 결을 달리하면서도 생각할 지점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첫 출연에서 옥자연은 촌스러운 무늬의 이불에서, 낡은 잠옷을 입고 잠에서 깨어난다. 물건을 잘 못 버려서 잠옷도 이불도 17년이 되었고, “버리고 싶은데 안 찢어진다”고 말하며 웃는다. 물건의 효용이 다하면 교체한다. 지극히 평범한 진리지만, 소비를 미덕으로 여기고 새로운 물건을 쓰는 것이 ‘자기돌봄’이라고 속삭이는 세상에서는 망가져 있는 감각이다. 기안84가 “우리는 다 쓰지도 입지도 못하는 걸 산다, 이 지구에 얼마나 못할 짓을 하는 건가”라고 코멘트하자 전현무가 머쓱해한다. 그는 ‘트렌드에 민감한 남자’ 일명 ‘트민남’이라는 캐릭터를 구축하면서 자타공인 소비아귀(방송에서는 ‘요정’이라고 부른다, 하지만…)로 활약 중이다. 그는 좋아 보이는 것이나 유행하는 것이라면 일단 사들이고, 그렇게 산 물건으로 에피소드를 뽑아내고, 이후 산처럼 쌓인 물건을 팔거나 나눔한다. 전현무뿐만 아니다. 볼거리를 제공하는 직업인 연예인은 기본적으로 맥시멀리스트다. 뜯지도 않은 택배, 태그도 떼지 않은 옷, 손도 안 댔는데 유통기한 지난 식자재들, 시즌별 신제품, 같은 기능이지만 색깔별로 사들인 상품이 화면에 넘쳐난다. 소비는 재미있고, 매력적이고, 호탕하고, 삶을 즐기는 선택으로 의미화된다. 키, 박나래, 코쿤이 <나혼산>에서 ‘잘사는 삶’을 소비로 재현한다면 반대편에는 기안84처럼 ‘소비의 부재’가 ‘자기돌봄의 미숙함’으로 직결되는 인물이 있다. 그의 기행은 웃음거리로 쓰이지만 거기서 어떤 미덕을 도출하기는 쉽지 않다.

옥자연은 양극단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간소하고 검약한 삶도 아름답고 온전하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음식을 먹을 만큼만 만들고, 식어서 맛이 좀 없어지더라도 다 먹으면서 되도록 남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밝혔다. 지나치게 많은 음식을 시키고, 화려하게 진열하고, 조금씩 먹어보고, 결국 다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한 미디어 속 장면과 대비되는 장면이다. 조금만 조리 상태가 안 좋아도 거침없이 음식을 버리는 장면을 장인 정신으로 포장하는 요리 프로그램에서 느끼는 불편함도 떠오른다. 옥자연이 이용하는 ‘어글리 어스’라는 서비스도 눈길을 끌었다. 어글리 어스(ugly us)는 못생겨서 상품 가치가 떨어지지만, 품질은 똑같은 친환경 제철 농산물을 산지에서 직접 ‘구출’하여 소량씩 보내주는 정기 배송 서비스이다. 모양 때문에 멀쩡한 농산물이 버려지는 것은 여러모로 큰 낭비다. 꼭 필요한 만큼만 소비하고 낭비를 지양하려는 가치관과 통하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자신이 먹을 빵을 사러 가면서 꽤 먼 거리를 천천히 걸어가며 주변의 풍경을 관찰하고, 계절의 변화를 발견하고, 여유를 즐기는 모습이라거나 고요하게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는 옥자연의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불필요한 소비는 지양하고, 간소하고 담박하게 사는 삶. 옥자연의 신선한 일상은 기존의 관찰 예능 속 소비로 점철된 삶에서 피로감을 느꼈던 시청자로부터 유의미한 열광을 끌어냈다. 옥자연은 5주 만인 3월21일 <나혼산> 588화 재출연하며 변함없는 ‘자연주의’ 삶을 보여주었다.

무분별한 소비를 경계하고 욕망을 통제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프로그램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과소비를 단속한다는 콘셉트의 <짠남자>(MBC)에서 과도한 물티슈 사용을 규탄한 장면이나, <김생민의 영수증>(KBS2)에서 무의식적인 소비 패턴을 찾아내는 기획은 유의미하고 예능적으로도 재미있다. 다만 이 프로그램들은 소비를 줄여서 개인의 경제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제는 좀 더 미디어에 만연한 소비주의를 본격적으로 비판하고, 소비에 따르는 책임을 직면할 때다. 소비를 재미로, 방송용 소재로 남용하는 것에 이제 경각심이 필요하다. 물론 쉽지 않다. 미디어의 소비주의는 광고가 있어야만 유지되는 제작 시스템의 한계와 자본주의 자체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광고를 달고 다니는 연예인 개인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는 없는, 구조적 문제이다. 화제의 다큐멘터리 <지금 구매하세요:쇼핑의 음모>(넷플릭스)는 브랜드들이 고객의 소비를 유도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과, 그것이 우리의 일상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다. 실제로 산업 내부에 종사했던 이들의 내부 고발로 밝혀진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더 많이 팔아라’. 패스트패션이 대표적이다. 자라가 한 해 만드는 신상품은 3만6000가지가 넘고, 중국 브랜드인 쉬인은 130만가지가 넘는다. 두 번째, ‘쓰레기를 늘려라’. 튼튼하게 잘 만들면 신규 구매 빈도가 줄어들기 때문에, 기업들은 물건을 의도적으로 허술하게 만들고 수리조차 막아버린다. 세 번째, ‘철저히 속여라’. 기업은 친환경을 표방하는 척한다. 네 번째, ‘꼭꼭 숨겨라’. 이미 만들어낸 폐기물을 숨기는 전략은 소비자들이 소비 이후의 진실을 알지 못하도록 한다. 분리배출을 하면 자원이 재활용되리라 믿지만, 결국 이 쓰레기 처리 작업은 빈곤 국가로 넘어간다. 다섯 번째는 ‘강력히 통제하라’. 기업은 직원들을 통제하고 압박하여 이러한 사실을 숨긴다. 이 철저한 마케팅 속에서 소비는 쾌락만 남고, 물건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디로 가는지는 사라지니, 책임도 고민도 증발한다.

2024년 방영한 <산으로 간 조별과제>는 KBS 환경스페셜 팀이 제작한 기후위기 웹 예능 프로그램으로, ‘기후변화 대응 일상 토크쇼’다. 총 8부작이고, 가비·궤도·천재이승국·재재가 출연 및 진행했다. ‘조별과제’는 80억이 함께하기에 성공하기 힘들다며 기후위기 대응을 자조하는 고전적인 농담이다. <산으로 간 조별과제>는 환경 문제의 전문가는 아닌 출연자들을 모아놓고 물가나 패션, 덕질 같은 주제 등의 토론 과제를 던진다. 출연자들은 각자의 관심에 따라 딴소리를 하면서 토론은 ‘산으로’ 가지만, 이 엉망진창 조별과제는 존재 그 자체로 유의미하다. 환경과 소비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미디어에서 접하기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덕질이 세상을 구한다> 편에서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실천하는 방식이 소비주의에 갇히면 환경오염을 초래하지만, 세계를 향한 관심으로 확장될 때의 가능성을 언급한다. 같은 맥락에서 K팝 팬들의 기후위기 대응 플랫폼 <케이팝포플래닛(KPOP4PLANET>을 소개한다. 이들은 “우리의 지구가 내 최애보다 핫해지고 있다는 사실, 눈치채셨나요?”라는 슬로건을 걸고 2021년 출범했으며, 기획사의 과열된 마케팅으로 인한 과도한 앨범 생산과 쓰레기 생산,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스트리밍 서비스 실태를 규탄한다. 사랑을 소비로 증명하라는 산업에 맞서 지속 가능한 미래를 꿈꾸고,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다.

소비 조장은 사실 훨씬 복합적인 문제라, 고강도의 노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소비로 푸는 패턴 등 말하자면 끝이 없다. 그러나 미디어 차원에서 필요한 변화는 명확하다. 소비의 즐거움을 과장하지 말고, 사고 쓰는 것에 연루된 진실을 은폐하지 않는 것. 우리에게는 빼곡한 소비주의 사이를 뚫고 피어나는 일상적 혁명의 순간을 상상할 권리가 있다. 기업이 만들어낸 ‘소비-좋은 삶’의 연결고리를 끊고, 적게 사고 아껴 쓰고도 가능한 생활을 더 많이 볼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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