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서 보기

2025-10-22

잠들기 전까지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깜깜한 침실에 가만히 누워있다 보면 점차 어둠에 적응하게 된다는 걸 알고 있다. 불을 끈 직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답답하다가도 조금씩 방 안에 있는 사물의 윤곽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둠 속에서 우리가 사물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까닭은 어둠이란 빛이 0인 상태가 아니라 여전히 미세한 광자가 움직이는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어둠도 완전한 어둠이 아니므로 눈이 아주 낮은 조도에 익숙해지면서 희미한 빛의 대비를 감지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어두운데도 이렇게 잘 보인다니. 아무리 깜깜해도 무언가가 보일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니.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건 내가 문학을 읽을 때마다 하는 경험이다.

모든 이야기는 어둡다. 이렇게 말하면 오해가 있을 수 있겠다. 모든 이야기가 인간의 음울하고 사악하고 불가해한 면을 다룬다는 뜻은 아니다. 유독 그런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인간의 맑고 선하고 투명한 면을 다루는 이야기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야기가 어둠 속에서만 보이는 풍경, 그러니까 너무 환한 곳에서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풍경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올봄에 출간된 서윤후의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를 읽으면서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 시집을 겨울을 앞둔 지금 뒤늦게 읽은 건 어쩐지 잘된 일 같다. 밤이 길어지는 겨울처럼 그야말로 어둠 속에 있는 시집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손전등으로 우리가 모르는 세계의 진실을 비추어내겠다는 욕심이 있을 법도 한데, 이 시집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반대다. 이 시집이 하려는 일은 어두컴컴한 암실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흑백 판화를 천천히 눈동자에 담아내는 것. 그 풍경이 대단히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지만 조용하고 단조로워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 시를 읽으면서도 그랬다.

“어둠을 숙려하는 동안 빛은 외출했고/ 여긴 북반구 거실처럼 창백하게 비워지려고 할 때/ 주문한 햇빛 램프가 배송 중이다//(…)// “이 제품은 계절성 우울과 숙면에 도움이 되는 빛을 뿜습니다 빛 치료의 도구이나 의료 기기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졸면서 본 <대자연의 신비>는 6부작으로 만들어졌다 깜빡 잠든 사이 문 앞에 도착한 110볼트의 햇빛 램프와 서른다섯 번째 입동/ 변압기가 없어 빛을 낳을 수 없을 때/ 그동안 모아온 햇빛이 나를 간추린다//(…)// 반사 기능이 지워진 거울 앞에서 면도기가 턱을 스치고/ 무성할 줄 알았던 상처가 조용하고// 조금 더 환했다면 없을/ 조금 더 밝았다면 사라질// 주문한 변압기를 싣고 다시 트럭이 올 때까지 /반딧불을 먹는 귀뚜라미/ 대자연을 반복하는 소파 위 잠든 사람”(‘햇빛 램프’)

추운 겨울 탓인지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화자는 빛을 쬔 지 오래되어 보인다. 대단한 효과가 있다고 믿지 않으면서도 인공적인 햇빛 램프를 주문하지만 그마저도 작동이 시원찮다. 하지만 어둠에 길들여진 눈은 다른 풍경을 본다. 환하고 밝았더라면 보이지 않았을 사물의 모양과 형태와 쓸모를. 문학을 읽을 때 나는 두 눈 크게 뜨고 세계의 어두운 구석을 낱낱이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들어오는 빛에 눈부셔하며 희미한 윤곽을 따라간다. 어둠에 익숙해진 사람은 환한 빛에 얼굴을 찡그릴 테지만, 찡그린 표정으로만 볼 수 있는 세상이 있다. 빛을 더해가는 것이 아니라 어둠으로 시야를 바꾸는 일. 주위가 어둡다면 조용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새로운 세상이 보일 때까지. 그것이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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