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생각나는 가객 ‘김현식’

2024-11-17

[우리문화신문=임세혁 교수]

2012년 10월 6일 자 빌보드 차트 순위에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2위에 기록되었다. 그리고 8년 정도가 지난 2020년 9월 5일 방탄소년단의 가 빌보드 순위에서 1위를 기록하였다. 우리랑은 다른 세계라고 생각했던 미국의 빌보드는 이제 한국 음악 시장의 가시권에 들어오게 되었고 김치와 태권도만이 우리나라를 대표했던 과거와 달리 K-POP이라는 우리의 대중음악으로 외국에 우리를 나타낼 수 있게 되었다. ‘임세혁의 K-POP 서곡’은 아무것도 없는 맨땅 위에 치열하게 음악의 탑을 쌓아서 오늘에 이르게 만든 음악 선학들의 이야기다.

생각해 보면 80~90년대만 하더라도 음악은 어느 정도 수준에서는 공급자 중심이었던 것 같다. 라디오에서는 진행자가 선곡해 주는 음악을 들어야 했으며 레코드판은 바늘을 한번 올리면 중간에 멈춤 없이 끝까지 들어야만 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고 길거리에서는 음반 가게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와 일명 길보드라 불리던 리어카 카세트테이프 판매 노점들에서 나오는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이런 까닭으로 당시에 길거리를 걷다 보면 가게마다 같은 노래가 흘러나오는 경험을 심심치 않게 해볼 수 있었는데 이걸 토대로 당시 곡이 히트했는지 아닌지를 가늠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인기라는 것이 막연하게 텔레비전 방송에 많이 나오는 것과는 관계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물론 텔레비전에 많이 나오면 인기가 있었던 것은 맞지만 굳이 방송 출연을 하지 않더라도 길거리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은 꽤 다양했었기 때문이다.

1989년만 하더라도 텔레비전 방송은 김흥국의 <호랑나비>로 도배가 되다시피 했지만, 라디오에서는 조정현, 김광석, 이승철, 김현철, 신촌 블루스 등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고 실제로 음반 판매 추정 수치도 텔레비전에 나오던 가수들과 공연 위주의 활동을 하는 가수들이 큰 차이를 보이지 않거나 공연 위주 가수들이 더 높게 잡히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우리 집에는 연세대에 재학 중이던 막내 이모가 같이 살았는데 그 덕분에 나는 당시 대학생들이 들었던 방송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소위 말하는 ‘언더그라운드’ 계열의 음악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때 이모가 들었던 음반들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음반이 하모니카를 불고 있는 김현식의 모습이 담겨있던 ‘김현식 3집’이었다. 그 음반 B면 (당시 음반은 레코드판과 카세트테이프로 앞뒷면을 나누어 A면과 B면이라 표기했었다) 첫 번째 곡이 <비처럼 음악처럼>이었는데 뭔가 쓸쓸하게 들리던 그의 거친 목소리와 ‘난 오늘도 비를 맞으며 하루를 그냥 보내요’라는 가사가 굉장히 인상 깊었던 기억이 있다.

사실 실용음악 계열의 발성과 가창의 지도 방식이 전문화된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예전 가수들의 발성법은 잘못되어 있는 부분도 많고 주먹구구식이라 가수의 재능이나 감 같은 개인의 능력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현식과 김광석 같은 가수들이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이런 까닭으로 요즘의 실용음악과 출신 가운데는 예전 가수들의 목소리에 대해서 호불호가 갈리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이건 발성법의 발전으로 인한 시대에 따른 선호도 차이라고 생각된다.

김현식도 근래 들어서는 이런 호불호의 대상이 되고는 한다. 특히 그의 유작이 되었던 6집의 경우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그의 건강 상태와 함께 도저히 올라가지 않는 소리를 억지로 내는 목 상태를 들을 수 있는데 그 음반의 대표곡인 <내 사랑 내 곁에>가 그의 사후에 엄청난 인기를 얻는 바람에 그의 원래 목소리가 그런 줄 알고 “곡 자체가 좋은 건 인정하지만 이 가수가 왜 유명한지는 잘 모르겠다.”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인터넷 게시판에서 이런 글이 올라오면 댓글은 그야말로 세대 사이 갈등으로 난리가 난다.)

그런데 그렇게 발성의 체계가 잡히지 않았던 시기였고 녹음의 기술이 발전하기 이전의 시대였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가수의 개인적인 음악적 능력이 더욱 중요하게 작용했는데 김현식은 이 부분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으뜸 가수였다. 음악 평론가 임진모는 한 방송에서 당시 김현식의 위상을 설명하며 ‘땅 위에 조용필, 땅 밑에 김현식’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다.

그런 세간의 평가는 그렇다 치고 어린 나의 귀에도 그의 목소리는 엄청나게 멋있었다. 그래서 음악을 해야겠다 하고 생각했을 때 처음으로 연습했던 것이 김현식의 모창이었다. 그가 첫 음을 어떻게 내는지, 소리를 어떻게 끄는지, 살짝 뭉개듯이 굴리는 발음들도 전부 내 것으로 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애가 어른 옷을 입고 거울 앞에서 폼 잡는 거 하고 비슷한 건데 그때는 그의 소리를 흉내 낼 수 있으면 그것이 최고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내 생각은 그때와는 조금 다르다. 물론 내가 김현식을 좋아하는 건 변함이 없지만 내가 생각할 때 가수로써 그의 강점은 모든 노래를 그의 느낌으로 자연스럽게 살리는 그의 능력인 것 같다. 실제로 그의 대표곡 가운데 하나인 <비처럼 음악처럼>은 그가 발표했던 시기와 비슷할 때 밴드 ‘시나브로’ 출신의 가수 문관철이 부른 적도 있는데 들어보면 김현식의 느낌과는 상당히 다른 점을 알 수 있다.

김현식의 노래는 작곡가가 만든 원작과 비교했을 때 가사의 일부분이나 특정 음계를 바꿔서 부른 경우가 있는데 이 부분이 곡의 전체적인 느낌과 잘 어우러지면서 김현식 특유의 분위기를 잘 살려주고 있다. 이건 김현식이 곡과 자신의 소리에 대한 이해도가 굉장히 높다는 것을 의미하며 나는 이것이 진정한 김현식의 특별함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마지막까지 병원에서 탈출하여 녹음하면서 음악에 대한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는 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사실 발성 면에서는 좋은 소리가 아닐지도 모르는 그의 마지막 음반에 실려있는 노래들이 많은 사람에게 울림과 감동을 주는 건 음악이 그리고 예술이 결코 기술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훌륭한 예라고 생각한다.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그는 노래 부르는 것 그 자체를 엄청나게 사랑했던 것 같다. 그가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같이 입원해 있던 환자의 생일에 선물삼아 환자들과 간호사들 앞에서 기타 한 대와 선보인 그의 마지막 공연이 녹음 된 그의 ‘병상 라이브’ 앨범을 들어보면 다 쉬어버린 그의 목소리에 노래와 음악에 대한 사랑이 느껴져서 들을 때마다 울컥하기도 한다.

그가 떠난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와 같이 활동하던 장기호, 박성식, 김종진은 가요계의 원로급들이 되었고 전태관은 고인이 되었다. 그가 연출자와의 마찰 탓에 무단으로 이탈했던 방송에 대타로 급하게 섭외가 되었던 신인 가수 이승철도 이제는 한국 대중음악의 거장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와 함께 활동했던 들국화, 한영애, 신촌 블루스, 그리고 그의 본거지였던 동아기획 사단까지 지금은 어린 세대들이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이 되었지만, 지금의 한국 대중음악이 있기까지 가장 중요한 과도기였던 8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함으로써 지금의 K-POP이 있을 수 있는 기반을 탄탄하게 다졌다.

영화 <슈퍼맨 리턴즈>에 보면 ‘아들은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는 아들이 된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가 불렀던 노래는 누군가에게는 위로였고, 이정표였고, 목표였고 그 밖에 많은 의미였을 것이다. 그렇게 아들이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아들이 되듯 그가 생의 마지막까지 불태웠던 노래에 대한 열정은 계속 누군가에게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가 되어 살아있다고 본다.

멀리서 볼 필요가 뭐 있나, 일단 나부터가 그렇게 노래를 시작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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