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6일 만에 관저 떠나…국민 심경 참담
조기 대선, 극한 갈등 극복의 장 돼야
개헌 국민투표 무산 유감…불씨 살리길
윤석열 전 대통령이 11일 오후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서 퇴거해 사저인 서초동 아파트로 옮겼다. 2022년 11월 7일 서초동 사저에서 관저로 옮긴 지 886일 만이자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인용한 지 일주일 만이다. 임기를 2년 넘게 남기고 파면당해 관저를 떠난 전직 대통령을 바라보는 국민의 심경은 참담하다. 여야가 줄탄핵과 계엄이란 극한 대결로 치달은 최악의 ‘혐오 정치’가 윤 전 대통령의 퇴거를 통해 종지부를 찍고, 국민 통합과 상생의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윤 전 대통령 퇴거와 함께 조기 대선전이 본격화했다. 국난을 부른 정치의 실패를 수습해 미래로 나아가려면 유권자에게 ‘차악’을 뽑도록 강요해온 진흙탕 대선을 넘어 정책과 비전이 선택의 잣대가 되도록 대선판을 바꿔야 한다.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대선 주자들부터 환골탈태해야 한다. 무엇보다 상대방을 향해 ‘내란 세력 타파’와 ‘이재명은 안됩니다’만 외치는 네거티브 정쟁을 접어야 한다. 국민의힘 후보들은 반(反)이재명 정서만 내세워선 민심을 얻지 못할 게 명약관화하다. 윤 전 대통령의 계엄 선포가 위헌이고 잘못임을 분명히 인정하고 국민께 사과하는 것이 먼저다. 이어 통합과 재도약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정책 경쟁에 나서야 등 돌린 민심을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윤 전 대통령은 이날 퇴거하면서 내놓은 대국민 메시지에서 “나라와 국민을 위한 새로운 길을 찾겠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으로 탄핵돼 권좌에서 내려온 만큼 사저에서 특정 정치인을 만나 메시지를 내는 등 대선 개입 논란을 부를 행동은 자제해야 한다. 과오를 반성하고 성찰하면서 재판에 성실히 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재명 전 민주당 대표도 ‘내란’ 프레임으로 대선에서 손쉽게 이기겠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이 전 대표는 최근 대선 주자 가운데 독주 양상을 보이면서도 무당층 여론 조사(중앙일보·한국갤럽 8~9일)에서 국민의힘 주요 후보들에게 열세를 보였다. 지난 3년간 극한의 대결 정치에 이 전 대표의 책임도 상당하다는 여론이 그의 확장성을 가로막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대선 출마 선언에서 ‘대한민국’만 11번을 외치는 등 통합과 성장에 방점을 찍은 모습을 보여줬다. 좋은 출발이지만,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상대방에 대한 비방 대신 민생과 성장을 위한 구체적 전략과 통합의 메시지를 캠페인 전면에 내세우고, 트럼프발 관세전쟁 등 국가적 난제에 초당적으로 대처하겠다는 협치의 약속이 절실하다.
이번 대선은 한계가 명확해진 ‘87 체제’를 종식할 개헌의 적기이기도 하다. 제왕적 대통령과 야당의 무한대결을 조장하는 현행 헌법으로는 더 이상 나라를 끌고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 전 대표를 제외한 모든 대선 주자가 개헌에 찬성하고 국민도 60%가량이 개헌을 원하고 있다. 우원식 국회의장의 ‘대선과 개헌 국민투표 동시 실시’ 제안은 그런 흐름에 부응한 적절한 조치였다. 어려운 권력구조 개편은 이번 대선에서 하고, 나머지는 내년 지방선거 때 2차 개헌을 하자는 점에서 현실성 높은 제안이었다. 그러나 이 전 대표가 사실상 반대 입장을 밝히고 친명계 의원들이 “국회의장 놀이 그만하라”며 압박하자 우 의장은 사흘 만에 제안을 철회하고 말았으니 안타깝다. 모처럼 만개한 개헌 논의가 무산된 책임의 큰 몫은 이 전 대표에게 있다. 그는 “내란 종식이 먼저”란 이유를 들고 있는데, 망국의 대결 정치를 종식할 확실한 방법이 개헌이란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제라도 개헌 논의에 동참해 시대정신을 포용하는 결단을 내리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