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3년 3개월을 넘어서면서 양측 사상자가 군인을 포함해 15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하면 전쟁을 24시간내 끝내겠다”고 했지만 허풍에 불과했다. 러시아는 25일(현지 시간)에도 300대 넘는 무인기를 동원해 우크라이나를 공습했다. 그 사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점령지 확대를 위해 지상전을 강화하고 있다. 무고한 민간인까지 희생자가 속출하고 있는 두 개의 진짜 전쟁도 문제지만 총성 없는 미중 간 무역 전쟁은 세계 경제를 흔들고 있다. 증시 추락과 국채 값 급락, 신용등급 강등의 수모를 겪으며 미국이 중국과 협상 테이블에 앉았지만 중국을 향한 압박은 더 거세질 것이다. 중국 역시 순순히 이를 용납할 리는 없다.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군대를 보내 개입하고 미중 관세 전쟁에 무역·투자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간에 한국의 컨트롤타워는 시대착오적인 ‘비상계엄’을 선언했다가 넉달 만에 붕괴됐다.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전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할 때까지 내전 양상으로 치닫던 진영 간 대립은 조기 대선을 앞두고 한층 격화하는 형국이다. 정치 초년병인 대통령 권한대행이 권력 욕심에 대선판에 뛰어들었다 세간의 비웃음거리가 됐고 ‘의료 대란’에 책임이 있는 초유의 ‘대대대행’은 뭘 하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글로벌 경제안보 지형이 소용돌이 치는데 대한민국호를 이끄는 리더십 실종 사태에도 그럭저럭 버티는 나라가 신기하다면 단언컨대 기업을 보라고 말하고 싶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결산을 마친 코스피 상장사 636개사가 올 1분기에 만들어낸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759조 1712억 원, 56조 9957억 원이다. 매출은 1년 전보다 6.6% 늘었고, 영업이익은 23.5% 성장했다. 기업 경영 환경은 여전히 어렵지만 불법 계엄과 탄핵 정국의 혼란을 뚫고 세 개의 전쟁이 난무하는 지구촌을 누비며 일궈낸 성과다.
급변하는 국내외 환경에 대응하면서 기업인들은 외교안보 공백까지 메웠다. 대한상의 수장인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2월 재계 사절단을 이끌고 백악관과 미국 재무부 관계자들을 만나 한미 간 반도체·에너지·조선 등의 경제협력 모델을 제안하며 트럼프 정부를 달랬다. 한미 동맹을 다진 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3월 중국을 찾아 일주일을 머물며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났다. 미국을 고려해 최 회장은 베이징에 가지 않고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이 시 주석을 만나는 전략적 균형감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트럼프가 찜찜해 할 가능성에 정의선 현대차 회장이 나서 미국에 31조 원의 투자 보따리를 풀며 백악관을 찾았고 트럼프는 ‘생큐’를 연발하며 만족해했다. 일본이 서운할세라 이 회장은 4·5월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찾아 수십 년간 쌓아온 인맥을 총동원해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은 한일 관계의 재도약에 공을 들였고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인도를 방문해 경제안보의 후방을 튼튼히했다. 김동관 한화 부회장과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은 미국과 인도 정부에 세계 최고의 방산과 조선업 경쟁력이 한국에 있음을 알리는 전도사 역할을 했다.
기업들이 조만간 출범할 새 정부를 기다리며 글로벌 통상 전쟁의 한복판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대선 후 대통령실과 정치권이 빠르게 전열을 가다듬고 한미 관세 협상과 방위비·북핵 이슈 등을 잘 관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인수위도 없이 새 정부가 충분한 준비를 갖췄다고 억지를 부려도 12·3 계엄 이후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의 모든 과정을 지켜본 국민이 이를 쉽사리 믿지도 않을 것이다.
결국 새 정부가 난세를 수습하고 대한민국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려면 전장을 먼저 지켜온 기업을 존중하면서 국정의 주요 파트너로 삼아야 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나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 모두 인정했듯이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경기를 회복시킬 수 있는 주체는 기업이다.
갈수록 양극화하는 사회의 해법이 될 경제성장률 제고 역시 기업이 마음껏 뛸 수 있을 때 시작할 수 있다. 이념과 진영의 논리에 갇혀 정치 리더십의 빈자리를 채워온 기업의 발목을 잡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경제의 중심에 기업이 있다”고 역설했던 대권 후보들의 말이 선거 이후에도 꼭 실천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이는 제 21대 대통령에게도 당연히 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