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인문학] 제주 4·3, 무명천 할머니의 비극은 사라졌을까

2025-04-03

총탄에 날아간 턱을 무명천으로 가린 채 산 55년 세월

할머니가 겪었던 야만의 시간은 이 땅에서 사라졌을까

[서울=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몇 해 전에 제주 둘레길 걷기에 나섰다. 둘레길 걷기는 대개 제주 바다의 풍광을 즐기면서 건강도 챙기는 일석이조의 여정이다. 그런데 무심코 들어간 마을에서 제주섬이 품고 있는 역사적 비극을 마주하고 망연자실한 적이 있었다. 제주시 한림읍 월령마을의 진아영 할머니 생가. '무명천 할머니 삶터'라는 이정표를 보고 들어간 그곳에서 만난 건 제주 4·3의 뼈아픈 흔적이었다.

이곳은 진아영 할머니가 노후에 살았던 집이다. 진아영 할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부터 집안살림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진아영 할머니는 누구인가? 할머니는 4·3 항쟁 때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에 턱을 잃고 55년을 살다가 세상과 작별했다. 평생 누구에게 책임을 묻지도 못한 채 비극적인 삶을 이어나가야 했다. 적어도 그 사고 이전에 진아영 할머니는 이름처럼 순박한 아름다움을 가진 처녀였다.

1949년 1월, 한경면 판포마을에 한 무리의 토벌대가 들이닥쳤다. 아버지가 다급하게 딸에게 어서 피하라고 말했다. 토벌대가 무차별적으로 학살에 나섰다고 소문이 났었기에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진아영 할머니는 집 밖으로 나와 어둠 속으로 뛰었다. 그러나 토벌대가 쏜 총탄을 맞고 그대로 꼬꾸라졌다. 며칠 뒤에 깨어났을 때 진아영 할머니는 총탄에 턱이 날아간 상태였다. 하필 거기 살고 있었다는 죄밖에 없는 할머니는 무명천으로 얼굴을 감싼 채 살아야 했다. 턱 전체가 없어져서 밥을 제대로 씹을 수가 없었다. 소화도 되지 않아서 늘 진통제와 약에 의존한 채 살았다.

살아생전 할머니는 주변에 틈틈이 선인장을 심었다. 선인장들은 할머니에겐 무료한 시간을 함께하는 벗이었다. 그 열매들을 채취하여 약값에 보태기도 했다. 2004년 9월 향년 90세의 나이로 세상과 작별했다. 결혼도 한 바 없고 자식도 없었다. 늘 혼자였다. 할머니는 집안에 있을 때도 항상 자물쇠를 꼭꼭 걸어 잠갔다. 토벌대의 총에 맞았지만 사과나 배상을 하겠다는 정부도 없었다. 작고하기 직전에야 국가의 책임에 대하여 대통령이 공식 사과했다. 기막힌 할머니의 삶도 다시 재조명됐다.

다시 봄이다. 지금 이 땅에서는 진아영 할머니가 영문도 모른 채 당했던 야만의 시간이 사라졌을까.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기 힘든 오늘이다. oks34@newspim.com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