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의 경주 한·미 정상회담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5-10-19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2005년 11월 17일 경북 경주에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만났다. 한·미 정상회담이 서울 아닌 지방 도시에서 개최된 것은 무척 이례적이다. 그해 한국이 의장국을 맡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 정상회의가 부산에서 열렸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하겠다.

권양숙 여사, 로라 부시 여사까지 합석한 정상들의 오찬 행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두 대통령은 식사 후 부부 동반으로 경주의 자랑거리인 불국사 경내를 산책하는 정겨운 광경까지 연출했다.

이처럼 겉으로 드러난 것과 달리 경주 정상회담은 심각한 의견 충돌의 연속이었다. 에이펙 회의 직전 미국 재무부가 “북한이 마카오 방코 델타 아시아(BDA) 은행을 통해 불법 자금을 세탁하고 위조 달러 지폐도 유통했다”며 고강도 금융 제재를 단행한 것이 갈등의 단초였다.

노 대통령은 당시 남북 관계가 개선되는 점을 들어 “미국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북한은 다시 문을 걸어 잠그고 변화를 거부할 것”이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에 부시는 “북한은 세계에서 미국 돈을 가장 많이 위조하는 나라”라며 “누군가 한국 돈을 위조한다면 그냥 두겠는가”라고 맞받았다. 부시 곁에 배석한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 대사(2005∼2008년 재임)는 훗날 그때를 “사상 최악의 한·미 정상회담”이라고 회상했다.

어쩌면 부시 본인도 똑같은 생각을 가졌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퇴임 후 노 대통령과 안 좋았던 기억은 다 잊어버린 듯하다. 아마추어 화가로 변신해 인물화 등을 그리는 것으로 소일하는 부시는 노 대통령 10주기 기일(忌日)인 2019년 5월 23일에 맞춰 방한했다. 그리고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열린 추도식에 참석해 추모사를 했다. 직접 그린 노 대통령 초상화를 영전에 바치며 부시는 고인을 “자신의 목소리를 용기있게 내는 강력한 지도자”라고 불렀다.

이어 “그 목소리를 내는 대상은 미국 대통령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경주 정상회담 당시 노 대통령이 세계 최강국 지도자이자 동맹국 정상인 자신 앞에서까지 핏대를 세우며 한국의 국익, 그리고 남북 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옹호하던 모습을 떠올린 듯했다. 부시는 “(노 대통령과 나 사이에) 의견차는 있었지만 동맹의 중요성과 동맹이 공유한 가치에 우선하진 않았다”고 단언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경주 에이펙 정상회의를 계기로 오는 29, 30일 이틀간 방한한다. 이 기간 이재명 대통령과 만날 것이 확실한 만큼 2005년 이후 꼭 20년 만에 경주에서 한·미 정상회담이 열리게 됐다. 부시와 트럼프는 같은 공화당 출신이란 점 말고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부시가 2016, 2020, 2024년 세 차례 대선 모두 트럼프 말고 민주당 후보에게 표를 던진 점만 봐도 그렇다. 이 대통령이 트럼프와 대면하는 것은 지난 6월 취임 후 이번이 두 번쨰다. 무역·관세 협상, 주한미군 역할 변경, 방위비 분담금 인상 등 난제가 잔뜩 쌓여 있어 과연 성공적인 한·미 정상회담으로 기록될 수 있을지 걱정하는 이가 많다. 부디 이 대통령이 부시의 조언을 가슴에 간직한 채 회담에 임했으면 한다. ‘한·미 간에 의견차가 있으나 동맹의 중요성이나 동맹이 공유하는 가치에 비할 바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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