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 칼럼니스트
세상을 바꿔놓는 것이 시류, 시대의 물결이다. 이 물결이 물폭탄이라도 맞은 듯 순식간에 급류로 흐른다. 의식주와 풍속의 변화가 놀랍다. 가파르고 변화무쌍하다. 소중히 여기던 가치가 별안간 몰가치로 영락하는 경우도 있다. 불의 심판으로 빚어낸 고려청자의 비색이 천년 세월에도 불변임에 감탄한다.
닷새 후면 설이다. 살아가는 시름을 놓고 현실의 고통도 잠시 저버리고 아들딸이 부모에게 절하고 형제끼리 함박웃음을 터트리며 끌어 안는 날이다. 추석보다 앞세우는 것은 한 살을 더 먹는 기쁨에 가슴 설레서일까. 더욱이 하던 일상의 일을 잠시 접고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달려가 어머니 품에 와락 안기는 감격을 무엇에다 견줄까.
한데 요즘 2030 세대들의 취향은 영 딴판이다. 설에 대한 부정 인식을 가진 사람이 6~7할에 이른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꼰대라 나무랄지 모르나, 나는 그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한국인들은 설 며칠 전부터 수없이 귀성길을 오간다. 열나게 작동하는 그 길 위엔 조바심이 인다. 열 시간을 타고 가야 하는 멀고 지루한 길을 마음이 오가는 것이다. 귀성으로 세계적인 거대 서울이 공동화할 지경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경험하지 못 하는 일이다.
공항이나 뱃머리에 마중나와 눈 빠지게 손주를 기다릴 아버지를 떠올린다. 다급한 마음이 집 골목을 접어들며 빵빵 소리에 가는 귀 먹은 늙은 어머니도 물 만지던 손째로 뛰쳐 나와 집어귀가 들썩이게 소리 지른다. “아이구, 내 새끼들 왔구나. 내 새끼들.” 그 소리가 심중에 박여 그 먼 길을 나서는 것 아닐까. 한순간, 하얗게 웃으며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은 얼마나 맑고 아름다운가. 진주보다 곱다. 물 밀 듯 흐르는 귀성행렬은 정으로 사는 한국인의 정신의 표상이다. 바라만 봐도 눈시울이 촉촉해 온다.
하지만 이도 한때. 만남의 의식은 금세 끝나고 지친 몸 뉠 겨를도 없이 썰고 지지고 볶고 구우며 은연 중 제수를 장만하는 일 속으로 빨려든다. 떡 묵 산적을 만드는 일이 녹록지 않을 것은 불문가지, 며느리(대체로 도시 출신의) 문제다. 서투른 손매에다 하루 종일 옴치고 앉아 있자니 그런 고역이 없다. 인내의 한계를 들락날락 할 게 아닌가.
화가 나고 억울하고 고약하지만 볼멘소리는커녕 불만에 찬 자신을 시집 식구들에게 들킬라 표정관리에 식은땀을 쏟는 중이다. 어쩌다 감정선이 무너지면 무작정 뛰쳐나갈지 모른다. 즐거운 설명절에도 악재가 따르는 모양이다. 당초 몇 마디 오가던 친족간의 정담도 이어지는 일에 밀려 침몰하고 만다.
명절 포비아(phobia)다. 불안한 상황을 죽기살기로 피하고 보자는 것이다. 놀라움, 두려움으로 공포를 느끼는 현상이다. 명절중후군이란 말이 그냥 생긴 게 아니다. 화합을 위한 명절이 외려 화합을 깨는 부정적 인식의 화산으로 돌변한다. 명절 풍속이 그만 밑동째 흔들리고 말잖는가.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 추석상에 과일과 꽃만 올린다는 말도 있다. 그런다고 속도에 집착하면 번번히 넘어진다. 오랜 것 해묵었다고 전통이 아니다. 전통도 창조하는 것, 답습하면 인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