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스포츠 라운지

메블루트는 1969년 중부 아나톨리아의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난 열두 살 소년. 아버지를 따라 이스탄불에 간 그는 학교를 다니며 거리에서 요구르트를 판다. 어느 날 사촌 형의 결혼식장에 간 메블루트는 라이하라는 소녀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가 보낸 연애편지에 답장이 오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은 깊어간다. 그렇게 3년이 흐른다. 둘은 치밀하게 계획을 짜 한밤중에 도망친다.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새도 없이.
“번개가 치면서 하늘, 산, 바위, 나무, 사방이 먼 기억처럼 밝아졌다. 메블루트는 평생을 함께 보낼 아내의 얼굴을 처음으로 가까이 보았다.”(오르한 파묵, 『내 마음의 낯섦』 22쪽)
경기하는 날이면 장충체육관 구름관중

섬광 속에 드러난 소녀의 얼굴은 메블루트를 단번에 사로잡은 그 눈빛의 주인이 아니다. 메블루트도, 독자도 뭔가 잘못되었음을 안다. 그런데… 메블루트는 내색하지 않는다. 담담히 운명을 받아들이며 그녀를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거리에서 보자(튀르키예 전통음료)를 팔며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간다. 이스탄불에서.
우리가 이스탄불을 떠올릴 때, 그곳은 진짜 이스탄불이 아니다. 유럽 또는 미국 기독교 문화의 자장(磁場)에 사로잡힌 우리의 의식 속에서 그 도시는 콘스탄티노플이며 비잔티움이다. 오스만에 함락된 1453년 5월 29일 이전의, 그리스어를 사용한 동로마제국의 수도. 파묵의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비로소 오스만의 숨결이 생생히 살아 숨 쉬는 도시, 우리의 과거를 닮은 튀르키예의 도시와 대면한다.
파묵의 도시 이야기는, 뉴욕 타임스가 썼듯이 ‘이스탄불의 눈에 보이지 않는 슬픔과 그것이 상상력 풍부한 한 청년에게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다. 그의 이야기는 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가. 거기 서울이 있기 때문이다. 시골을 떠나 몰려든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거대한 도시의 변두리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하루하루 버티듯 살아간다. 『내 마음의 낯섦』 속 마을과 골목들은 이 땅의 가난한 아버지가 수은주 곤두박질치는 저물녘, 봉지쌀을 옆에 낀 채 새끼줄에 꿴 구공탄 한 장을 들고 제 집을 찾아 스며들던 그곳이다. 지금은 없는.
텔레비전 앞에 모여 페네르바체와 갈라타사라이의 축구 라이벌전을 보고 제키 뮤렌의 노래를 듣는 이스탄불 사람들의 모습은 1970년대 서울의 변두리를 그대로 옮긴 듯 낯익다. 우리는 대청에 놓인 텔레비전 브라운관 속에서 ‘아씨’의 호된 시집살이를 연민하고 ‘쪽발이’를 혼내주는 김일의 박치기에 열광하지 않았던가. 김일!
베이비붐 세대의 스포츠는 김일-김기수-이회택-신동파라는 이름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 시절의 한국인들은 배가 불룩한 흑백 브라운관 속에서 작렬하는 김일의 박치기로부터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 간결한 콘셉트! 야비하고 잔인한 외국인(주로 일본인) 레슬러의 반칙에 말려 다 죽어가던 김일이 필살기인 박치기로 전세를 역전시키고 피가 철철 흐르는 얼굴로 두 주먹 번쩍 들어 올릴 때, 관중석은 환호와 흐느낌으로 충만했다.
김일이 경기하는 날이면 장충체육관에 구름관중이 모였다. 김일의 레슬링은 일본 영웅 역도산(力道山)의 레슬링과 맥이 통한다. 역도산의 레슬링은 패전국 일본의 시름을 덜어주었다. 역도산은 미국인 레슬러들을 초청해 국제대회를 열었고, 매번 극적인 승부로 관중을 열광시켰다. 거대한 체구의 미국인들을 가라테 기술로 때려잡는 광경을 보고 일본인들은 패전의 응어리를 잠시나마 풀었다.
김일은 1929년 2월 24일 전라남도 고흥의 거금도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기골이 장대했다. 힘이 장사여서 호남 씨름판을 휩쓸었다. 그는 일본의 레슬링 무대를 평정한 역도산을 동경했다. 1956년 일본으로 무작정 밀항했다가 시모노세키에서 단속 경관에 체포되어 1년형을 받았다. 수감된 김일은 매일 역도산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을 제자로 받아 달라고 호소했다. 김일의 의지와 정성에 감동한 역도산은 신원보증을 해 김일을 풀어주고 제자로 삼았다. 역도산은 김일에게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으면 스타가 될 수 없다”며 박치기를 익히게 했다. 피가 나도록 이마를 나무에 문지르고, 몇 미터 밖에서 뛰어와 벽에 부딪히게도 했다.
김일은 1959년 일본 프로레슬링 무대에 데뷔했다. 1963년에는 세계프로레슬링협회(WWA) 챔피언에 오르며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역도산이 야쿠자의 칼에 찔려 세상을 떠나자 충격을 받은 김일은 귀국한다. 그가 한국 레슬링의 부흥을 위해 만든 대회가 1965년 8월 6일과 7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극동헤비급선수권쟁탈전’이다. 한국과 일본의 프로레슬링협회가 공동주최했다. 양국을 대표하는 레슬링 스타들 가운데 김일과 요시노 사토가 결승에 올랐다. 김일은 고전했다. 거의 졌다 싶을 때 박치기가 터졌다. 사토는 나가떨어졌고, 김일은 극동헤비급챔피언이 됐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더러는 만세도 불렀다.
그 무렵 텔레비전은 아직 매스미디어의 지위에 오르지 못했다. 한국의 대중에겐 라디오가 익숙했다. 1979년 영국의 팝그룹 버글스가 ‘Video killed the radio star’를 히트시켰다. 그때도 베이비붐 세대는 ‘밤을 잊은 그대에게’와 ‘별이 빛나는 밤에’의 시그널을 들으며 통금을 맞았다. 1984년이 되자 영국 밴드 퀸이 ‘Radio Ga Ga’를 히트시킨다. 한국에서 컬러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된 지 4년 뒤의 일이다.
김일이 일본 레슬러들의 이마에 박치기 폭탄을 터뜨릴 때는 텔레비전 있는 집이 동네에 한두 곳이던 시절이다. 하늘에 별이 총총한 여름날 저녁, 안방극장의 주인은 대청에 텔레비전을 내놓고 마당에 돗자리를 깔았다. 이웃이 모여 김일의 경기를 시청했다. 따라온 어린아이들은 부모의 무릎에 앉아 마음을 졸이다가도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졸린 눈 가득 별빛이 스몄다. 계절이 바뀌어 추워지면 텔레비전을 안방으로 옮겼다. 아이들은 따끈한 아랫목에서 더 빨리 잠들었다. 어린 귀에 김일이라는 이름이 홍시 빛깔로 물들었다.
박정희 대통령도 열성팬, 자주 경기 관전

박정희 대통령도 김일의 팬이었다. 자주 장충체육관에 가서 경기를 관전했다. 그는 스포츠가 대중에게 호소하는 가치에 눈뜬 집권자였다. 스포츠의 대중적인 호소력이 국가와 국민을 극적인 차원으로 이끌어 동원의 기제로 상승 통합시킨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본능적으로 간파했다. 1966년 6월 25일, 권투선수 김기수가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누르고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미들급 세계챔피언이 될 때도 대통령은 장충체육관에 나가 지켜봤다.
김일은 1967년 WWA 세계헤비급챔피언, 1972년 도쿄 인터내셔널 세계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는 등 30여 년 간 20여 차례나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다. 1987년부터 경기 후유증 때문에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후배 양성과 프로레슬링 재건에 힘썼다. 1995년 4월 2일 6만 관중이 모인 도쿄돔에서 공식 은퇴식이 열렸다. 2000년 3월 25일에는 장충체육관에서 국내 은퇴식을 했다. 1994년 국민훈장 석류장, 2000년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았다.
21세기의 4분의 1이 지나갔다. 텔레비전은 더 이상 스포츠를 즐기는 유일한 통로가 아니다. 운동경기 때문에 거리가 텅텅 비는 일도 없다. 슈거레이 레너드와 토머스 헌스의 경기를 다방에 모여 관전하던 시절은 언제였던가. 그래도 누군가의 마음은 김일의 빛나던 한 시대를 향해 ‘타박타박 낙타처럼 걸어간다’(김영태의 시 ‘김수영을 추모하는 저녁 미사곡’에서). 가난과 비루함에 매달린 한 시대의 스포츠는 왜 그토록 반짝이는 것이었을까.
서울은 낯설어진 스스로를 파괴해 나간다. ‘전파상’이 즐비한 세운상가의 통유리 너머로 대통령컵 축구를 보던 날이 있었다. 어쩌면 당신과 나란히 서서. 운이 좋았다면 그곳도 피렌체나 베네치아의 뒷골목처럼 살아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피맛골의 운명이 기다린다. 어느 골목에서도 서울 사투리는 들을 수 없다. 과거란 낯섦의 너머에서 더욱 지극한 슬픔일까. 이 계절은 김일(10월 26일)과 역도산(12월 15일)의 기일 사이에 있다.

허진석 한국체육대 교수. 스포츠 기자로 30여 년간 경기장 안팎을 누볐으며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지냈다. 2023년 한국시문학상을 수상하고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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