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세계가 주목했던 ‘세기의 협상’이 다시 멈췄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플라스틱 오염 대응 국제협약(플라스틱 협약) 성안을 위한 ‘제5차 정부간협상위원회 속개 회의’(INC-5.2)는 합의안을 도출하지 못하고 지난 15일(현지시간) 막을 내렸다. 산유국이 강력히 반대하는 생산 감축 조항을 두고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산업계와 시민사회 간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렸다.
의장이 13일 내놓은 합의문 초안은 플라스틱 원료 추출부터 생산까지를 의미하는 ‘상류단계’ 관련 내용이 삭제되거나 자발적 조치로 돼 있어, 이를 지지하는 103개국의 의지뿐만 아니라 지난 3년간의 협약 추진 노력을 무력화했다.
15일 나온 수정 초안은 구체성이 강화됐다. 전문에 “현 생산·소비 수준은 지속 불가능하며 국제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문구가 추가됐다. 선주민과 지역사회의 지식 체계가 의사결정에 반영돼야 한다는 원칙도 새로 들어갔다. 조항별로는 단순한 ‘제조·수출입 통제’에서 ‘생산·소비의 감축과 단계적 퇴출’까지 범위가 확대됐다. 인체 건강 위험·화학물질 포함 여부를 기준으로 삼는 등 폐기물·재활용·보건 분야에서 진전을 보였다.
역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수정 초안에서도 국제사회가 요구해온 플라스틱 생산 감축, 유해 화학물질 규제, 강력한 이행 체계는 공백 상태였다. 지구의벗 인터내셔널의 샘 코사르 코디네이터는 “국제 플라스틱 협약은 쓰레기 관리 협정이 아니라 불평등 교정을 위한 정의의 도구가 돼야 한다”며 북반구 국가들의 재정 기여와 오염자 책임 강화를 촉구했다.
불평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산 단계까지 포괄하는 강력한 협약이 필요하다. 플라스틱 오염은 폐기물 관리뿐 아니라 생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플라스틱은 대부분 화석연료에서 만들어지고, 지금 추세라면 2060년까지 생산량은 3배로 늘어난다. 국제 플라스틱 협약은 역사상 처음으로 플라스틱 생산에 법적 상한선을 둘 기회이고, 이 순간을 놓친다면 위기는 더 가속될 것이다.
결국 INC-5.2는 합의 없이 끝났지만, 시민사회는 “형식적인 합의라면 차라리 연기가 낫다”는 입장이다. 2022년 유엔환경총회 결의안이 천명한 전 생애주기 접근과 생산 감축을 담아내지 못한다면 협약은 사실상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제네바 협상장에선 다수 국가가 분명한 목소리를 냈다. 생산 감축에는 89개국, 화학물질 규제에는 120개국, 건강 조항에는 130개국,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 의사결정에서 투표 허용에는 120개국이 지지를 보냈다. 반대는 20~25개국에 불과했다.
협상 내내 소극적이던 한국 정부의 마지막 발언도 주목됐다. 한국은 “이번 협상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이끌어내지 못한 데 깊은 아쉬움을 표하며 ‘플라스틱 관련 재해’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 간 가교 역할을 지속하겠다”고 밝혔다. 이재명 정부는 올해 안에 ‘탈플라스틱 로드맵’을 수립하겠다고 공언했다. 한국이 국제 협상장에서 말한 ‘가교’ 역할을 국내에서 실천할 기회다. 로드맵이 단순한 재활용 확대를 넘어 생산 감축, 유해 화학물질 규제, 정의로운 전환을 명확히 담을 때 한국은 국제사회의 다수와 함께 플라스틱 오염 종식을 향한 전환을 견인할 수 있을 것이다.
과제는 분명하다. 우리는 산업계의 이해가 아니라 다수 시민과 미래 세대의 목소리를 선택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플라스틱 위기를 단순한 폐기물 문제가 아니라 기후·건강·정의의 위기로 직시할 수 있는가. 국제 협상장에서 확인된 다수의 의지는 이미 그 답을 향하고 있다. 이제 한국 사회가 응답할 차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