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등록 이주아동’ 강태완씨 산재 사망
어머니 이은혜씨 “문 두드릴 것만 같아”
‘그림자 인간’ 같은 미등록 이주민의 삶
“젊은 사람들 죽는 일, 더 이상 없기를”
“인터뷰를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요”라고 몽골 출신 이은혜씨(63)가 말했다. 취업 브로커에게 속아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된 뒤 30여년을 미등록 신분으로 살아 온 그는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포스트잇을 한 장 꺼냈다. 대통령 7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는 “1994년에 한국에 오고, 그 사이 대통령이 7명 바뀌었더라고. 한국 정부가 외국인들의 삶을 뭔가 바꿔줘야 하는데, 바뀐 게 없잖아요”라고 말했다.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국인 몽골에서 데려온 아들은 그의 희망이 되어줬다. 하지만 영주권을 목표로 누구보다 성실히 일하던 아들은 지난해 11월8일 산재로 숨졌다. 한국 사회에 큰 안타까움을 줬던 ‘군포 청년’ 강태완씨(사망 당시 32세)가 바로 이씨의 아들이다. ‘미등록 이주아동’인 아들은 한국에서 거의 평생을 살았지만, 서류상으로는 한 번도 한국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사람다운 삶’을 한 번도 허락해 준 적 없고, ‘사람다운 삶’을 눈앞에 뒀던 아들을 앗아간 한국을 이씨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는 “아들은 이미 사망했는데 인터뷰를 해서 무슨 소용인가”라면서도 “외국인들의 처지를 위해 (내 인터뷰가)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했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인도적 체류허가를 받아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이씨를 지난 22일 경기 군포 ‘아시아의 창’ 사무실에서 만났다.
“우린 그림자야···내가 보여요?”
러시아에서 대학까지 나오며 성실하게 살았던 이씨의 삶은 1992년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며 크게 흔들렸다. 사회주의 체제였던 몽골의 경제는 한순간에 뒤집어졌다. 급격한 전환은 “나라에서 월급 받으며 나라를 위해 일하던” 많은 이들을 생계 위기로 내몰았다.
1994년 이씨는 250여명의 몽골인들과 함께 한국으로 향했다. 취업 브로커 ‘미스터 리’가 모은 이들이었다. “한국에 가면 일자리도 많고 돈도 많이 준다”는 말에 속은 이들은 1인당 500달러를 냈다. 하지만 미스터 리는 사기꾼이었다. 취업비자를 알선해주겠다던 그는 그를 따라온 몽골인들을 한순간에 체류자격이 없는 미등록 신세로 만들고 잠적했다.
한국에서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된다는 것은 사업주에게 큰 약점을 잡히는 일이다. 저임금과 무한 초과근무, 비인간적 대우에도 ‘신고당할까 봐’ 저항할 수 없다. 일자리가 있다면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이든 해야 했다. 이씨도 가죽 공장에서부터 모텔, 식당, 유리공장, 김 공장을 전전했다. “되는 대로 일하는 거죠. 어디든. 아예 돈 안 준 적도 많았어.”
사회적 차별도 견뎌야 했다. 카드와 인터넷은 한국인 지인의 것을 빌려 써야 했다. 이름 모를 괴한이 집 창 밖에서 ‘조선족’이라 소리치고, 다음날 집 앞에 놓인 폐지더미에 불이 난 일도 있었다. “우린 그림자 사람들이야. 안 보여, 한국 사람들에게는. (기자는) 내가 보여요?”
한 번도 원망 않았던 아들
이씨의 유일한 희망은 27년 전 한국으로 데려온 아들 강씨였다. 몽골에 있던 남편이 바람이 난 뒤 이씨는 1998년 이혼을 했고, 6살이던 강씨를 한국으로 데려왔다. 강씨도 체류자격이 없었지만 한 목사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활발한 아이였던 강씨는 자신이 미등록 신분이라는 걸 알면서 위축되고 말수가 줄었다.
강씨의 꿈은 영주권 획득이었다. 강씨에게 영주권은 사실상의 고향인 한국에서 떳떳하게 한국인으로 살기 위한 길이었다. 강씨는 한국어로 말하고, 한국인 친구들과 놀고, 스스로를 한국인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휴대전화 구입부터 취업 같은 일상적인 일마다 장벽을 만나야 했다.
강씨는 최선을 다했다. 안정적인 체류자격을 얻기 위해 2021년 몽골로 자진출국했다가 2022년 3월 단기체류비자(C-3)를 받아 재입국했고, 한 전문대에 입학해 유학비자(D-2)를 받았다. 대학을 졸업한 뒤인 지난해 3월엔 전북 김제의 특장차 제조업체 HR E&I에 연구원으로 취업해 거주비자(F-2)를 얻었다. 5년을 일하면 영주권을 얻을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었다.
강씨는 한 번도 이씨를 원망하지 않았다. “착하고 듬직하고, 내 옆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회사도 하루도 빼먹지 않을 정도로 성실한” 아들이었다. 이씨도 최선을 다했다. 생계를 위해 “둘이서 여행 한 번 못 갈 정도로” 악착같이 일했다.
지난해 11월1일, 운전면허를 딴 강씨가 어머니의 직장 앞으로 새로 산 중고차를 타고 왔다. 면허도 차 구매도, 체류자격이 생기니 비로소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강씨와 이씨는 회사 주변을 한 바퀴 돌고, 강씨가 직접 예약해둔 식당에서 갈비찜을 먹었다. 이씨는 음식 사진을 찍어 사장에게 자랑했다. 1주일 뒤인 11월8일, 강씨는 무인 건설장비(텔레핸들러)를 이동시키던 중 장비와 차량 사이에 끼여 숨졌다.
이씨는 “아이 생각해서 내 인생을 산 적이 없었어. 이제 아들도 비자 받고 잘 되니까 좀 살 만하다 싶었는데,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라고 말했다. “언젠가 전화할 것 같고, 문 두드리고 집에 들어올 것 같고…”
젊은이들이 죽지 않는 세상, 언제 올까
아들을 잃은 이씨의 눈에 한국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죽음이 생생히 들어왔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와 세월호 참사에서 자녀를 잃은 유족들이 강씨 추모식에 찾아와 울면서 이씨의 손을 잡아줬다.
“옛날에는 그런 뉴스를 보면 얼마나 힘들까, 그것만 생각했어요. 한 번이라도 그분들 손을 잡아줄걸…그분들이 내 손을 잡아주니 이제야 생각이 들더라고.” 사고 이후 이씨는 사회적 참사 유족들과 연대하고 있다. 휴대전화 뒤편에 노란 리본도 붙였다.
이씨는 이해할 수 없는 사회에 맞서기로 했다. 아들 같은 젊은이들이 자꾸 일하다 죽고, 체류자격을 잃었다는 이유로 인간답게 살 수 없는 사회를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선진국이고 힘 있고 돈 있잖아요. 나는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사람답게 사는 거, 그거 하나만 해 주면 되는데.”
오는 3월 종료되는 미등록 이주아동 임시 체류자격 부여 구제대책은 아직도 연장 여부가 결정되지 않았다. 법무부는 임시 체류자격을 얻은 미등록 이주아동 1000명에 대한 실태조사를 벌이고 있다.
이씨는 인터뷰 말미에 지인에게서 온 안부 전화를 받았다. “죽지 못해 살고 있지. 아들 잘 지켜, 잘 해줘. 잔소리 대신 한 마디 좋은 소리 해 줘.” 이씨가 울먹였다. “순서대로 갔으면 좋겠어. 젊은 사람은 오래 살고…그런 세상은 언제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