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일까 땀방울일까, 마음 씻겨주는 이 물방울

2025-01-10

위로를 건네는 예술

한파주의보가 내렸습니다. 몸도 마음도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대참사가 날카로운 고드름처럼 가슴을 찌르는데, 패싸움하기 바쁜 위정자들이 과연 방패가 되어줄지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신문을 펼치면 우울한 뉴스만 가득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에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얼어붙은 심장을 녹이려면 서로가 정서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위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중앙SUNDAY는 위로의 가장 큰 통로가 문화예술이라고 믿습니다. 독자들의 불안과 상처를 예술 작품으로 달래는 기획을 마련한 이유입니다. 고전과 현대를 두루 섭렵한 미술사가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원장이 위로의 그림을, 국내 최초로 병원 내 예술치유센터를 설립한 클래식 애호가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이 치유의 음악을 골라주셨습니다. 이 지면을 펼치기까지 한 주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잠시 내려놓고 영혼의 쉼터로 향해 보시길 바랍니다.

양정무의 PICK 4 -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원장·교수

겨울이 깊어지고 있다. 창문 밖으로 앙상한 나무, 벌거벗은 산을 보고 있노라면 떠오르는 그림 한 점 있다. 박수근의 ‘나무와 두 여인’이라는 작품이다. 이파리를 다 떨구고 말라 비틀어진 나무가 화면을 한가득 채우고 있다. 그리고 나무 아래 아이를 업은 엄마가 바구니를 인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 그림을 감상할 때 먼저 나무만을 집중해 보는 걸 추천한다. 이렇게 보면 헐벗은 나무에서 처량함을 넘어 아픔이 느껴진다. 특히 작은 가지들은 아우성치는 손가락처럼 위로 솟구쳐 부르르 떨고 있다. 마치 뭉크의 ‘절규’를 나무로 그린 것처럼 힘들고 아파 보인다. 어쩌면 화가는 이런 앙상함과 절박함으로 전쟁 직후 한국 사회의 암담한 분위기를 담아내려 했는지 모른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2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박수근 개인전에서 이 작품을 직접 볼 수 있었다. 박수근 특유의 두터운 물감 층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나뭇가지마다 조금씩 노랗고 푸른 점들이 군데군데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화가는 그림 속 나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추위 속에 잠시 웅크리고 있을 뿐, 이제 곧 봄을 맞아 푸른 싹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고 속삭이듯 이야기한다. 새싹과 꽃망울이 품고 있는 마법 같은 봄 기운, 그리고 엄마와 아기, 묵묵히 걸음을 내딛는 여인에서 느껴지는 삶의 온기로 화가는 내일의 밝은 희망을 조심스레 담으려는 듯하다.

현재 이 시간이 막막해 보일 때, 우리보다 더 힘든 과거를 버텼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그들이 겪었던 힘든 과거를 되짚어 보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다시 일어날 힘을 얻곤 한다. 김창열의 ‘물방울’ 연작은 나에게 그런 힘을 준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 김창열은 나의 어머니보다 한 살 아래다. 1928년 생이신 나의 어머니는 지난 삶을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전쟁을 세 번씩이나 겪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중일전쟁(1937~1945), 태평양전쟁(1941~1945), 6·25전쟁(1950~1953)이 그것이다. 화가 김창열도 내 어머니처럼 스무 살 나이에 세 번의 전쟁을 경험했다. 그는 전쟁통에 중학교 동창생 180명 중 120명이 생을 다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6·25 피난길에 다섯 살 어린 누이를 잃어 무덤 앞에서 한없이 울어야 했다.

김창열은 프랑스로 건너가 나이 사십을 넘겨 본격적으로 물방울을 그리기 시작한다. 우연한 계기로 물방울을 그리게 되었다고 전해 오지만, 아마도 그에게 물방울은 그가 그간 힘들게 살아온 삶의 결정체였을 것이다. 보기에 따라 김창열의 물방울은 눈물일 수 있고, 새벽 이슬일 수도 있고, 구슬진 땀방울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씻기는 정화수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마다 다른 느낌을 주는 김창열의 물방울은 나에게 큰 위안이 된다.

삶이 힘들고 지칠 때면 우리는 어딘가로 멀리 떠나 작은 집을 짓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심플한 삶을 꿈꾼다. 이때 참고할 만한 집이 있다. 바로 현대 건축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르 코르뷔지에가 지은 작은 오두막집이다. 그는 1952년 남부 프랑스 지중해 해변 언덕에 조그마한 집을 짓는데, 면적은 3.6×3.6m로 약 4평에 불과한 작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집을 “웅장한 집” “작은 궁전”이라고 불렀다. 그는 여기서 여생의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그의 건축 개념을 응집시켰다.

반전이라면 창문으로 지중해의 따사로운 태양과 아름다운 자연이 쏟아져 들어 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티스가 그린 ‘열린 창’ 같은 세계가 그의 오두막집 창 안에 담긴다.

마티스는 1905년에 남부 프랑스 해변의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과 푸른 바다에 매료된다. 그리고 그곳의 풍경을 화려한 원색과 거침없는 붓 터치로 그려냈다.

‘열린 창’은 지중해의 어느 호텔 방에 도착해 발코니 창을 열었을 때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마주한 순간을 그리고 있다. 밝은 빛에 눈이 부시지만 푸른 바다와 돛단배들이 화려한 꽃으로 장식된 창문을 통해 서서히 시선에 들어온다.

사실 마티스뿐만 아니라 문명화된 삶에 지친 수많은 유럽의 예술가들은 따뜻한 남쪽의 나라를 동경하며 지중해로 향했다. 정서적으로 예민한 예술가들은 문명에 지친 삶이 푸른 자연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이곳으로 떠날 용기도 가지고 있었다.

겨울이 깊어지고 있다. 이 추운 겨울도 곧 지나고 나면 따뜻한 봄볕 아래 생명이 다시 꿈틀거릴 것이다. 이런 상상만으로도 메마른 감성에 생기가 도는 느낌이다. 그림은 이런 희망을 생생하게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 지금 이 순간 큰 위안이 된다.

이왕준의 PICK 7 - 명지병원 이사장·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장

※ QR코드를 찍으면 추천 음반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귀로 듣는 피에타 - 페르골레지(G. Pergolesi)의 ‘스타바트 마테르’

1710년 생으로 바흐·헨델과 동년배였던 페르골레지는 26살에 요절했기에 천재성을 다 꽃피우지 못했지만 죽기 직전 완성된 이 곡만큼은 당대에도 큰 인기를 끌었다. ‘스타바트 마테르’는 라틴어로 성모애가(聖母哀歌), 즉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바라보는 성모 마리아의 심정을 읊은 시가이다. 성베드로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상상하면 된다.

총 12곡이 실내악 반주에 소프라노와 알토의 독창과 이중창으로 구성된다. 제1~3곡까지가 절창인데 아들의 죽음을 목도하는 어머니의 심정이 절절하다. 제6~12곡에 이르면 마음 깊은 곳에 슬픔이 가라앉고 위로가 샘솟는다. 수많은 명반이 있지만 2011년 발매된 안토니오 파파노가 지휘하고 안나 네트렙코가 노래한 앨범을 추천한다.

바흐의 가장 명상적인 곡 - 요한 세바스찬 바흐(J.S.Bach)의 ‘프랑스 모음곡’ 전집

음악치료에서 가장 많이 활용하는 작곡가는 바흐와 모차르트다. 특히 바흐의 ‘프랑스 모음곡’은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더불어 가장 명상적인 곡이다. 총 6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유럽 여러 나라의 춤곡을 변형한 악장들의 모음곡(Suite)이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게 독일의 알라망드, 프랑스와 이태리의 쿠랑트, 스페인의 사라방드, 영국의 지그이다. 제5번이 가장 유명한데, 우아한 가보트, 사랑스러운 부레, 부드러운 루르 등 프랑스 춤곡들이 중간에 추가 배치되어 ‘프랑스 모음곡’이라는 제목에 어울린다. 앨범은 바흐 음악을 노장사상으로 풀어냈다고 칭송받는 주 샤오메이의 연주다. 상해 출신으로 문화대혁명 시기 5년간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미국으로 이주, 밑바닥부터 시작해 45세에 유럽무대에 데뷔했지만 당대 최고의 바흐 스페셜리스트로 평가된다.

지구상 가장 아름다운 여성 이중창 - 베르디의 ‘레퀴엠 Op.48’

오페라 거장 베르디의 또 다른 걸작은 진혼미사곡의 형식을 갖지만 완전히 연주회용으로 만든 ‘레퀴엠’이다. 1874년에 당대 최고 문호였던 알렉산드로 만초니의 서거 1주기에 맞춰 작곡했는데, 3년 전 올린 오페라 ‘아이다’를 마지막 작품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베르디는 이 곡을 자신을 위한 만가(挽歌)로 여기고 전력을 다했다. 총 7부 중 백미는 2부 ‘진노의 날(Dies Irae)’이다. 40분에 달하는 2부는 총 9곡으로 짜여 있는데,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중창’이라 불리는 제7곡 ‘기억하소서(Recordare)’와 4명의 독창자와 합창이 어우러진 제9곡 ‘눈물의 날(Lacrymosa)’은 최고의 위로를 준다. 요나스 카우프만과 엘리나 갈랑차 등이 독창자로 나서고 2013년 베르디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기획된 바렌보임 지휘의 라 스칼라 음반을 추천한다.

따뜻한 선율 속 정화된 슬픔 - 브람스의 ‘클라리넷 5중주 B단조 Op.115’

말년에 심신이 쇠약해진 브람스는 절필을 선언하고 무력하게 지내다가 우연히 당대 최고 클라리네스트 리하르트 뮌펠트의 연주를 듣고 영감에 휩싸여 클라리넷 곡을 여러 개 썼다. 모두 명곡이지만 특별히 이 5중주곡은 클라리넷 실내악곡 역사상 최고봉으로 꼽힌다. 중후하고 우아한 분위기 속에 명랑함과 발랄함이 조화를 이루고, 따뜻한 선율 속에 정화된 슬픔이 녹아 있다. 특히 1악장의 테마는 너무도 유명하다.

스웨덴 출신으로 고전과 현대는 물론 멀티미디어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최근 가장 활발한 클라리넷 연주자인 마틴 프로스트와 게베르트 사중주단의 연주를 들어보자. 마틴 프로스트는 2022/23 시즌에 세계 3대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암스테르담 콘체르트허바우의 상주 음악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인생의 황혼을 마주했을 때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마지막 4개의 노래’

슈트라우스가 죽기 1년 전 84세에 쓴 그의 ‘백조의 노래’다. 후기 낭만주의 거장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젊은 시절 교향시와 교향곡, 중년 이후 오페라에 집중했지만 평생 200여 편의 가곡도 남겼다. 사실 그의 모든 작품은 독일 가곡의 선율과 전통에 입각해 있다.

4곡 중 ‘봄’‘9월’‘잠들러 간 사이에’는 헤르만 헤세, 마지막 곡 ‘저녁노을’은 아이헨도르프의 시에 곡을 붙였다. 붉게 물든 노을처럼 인생의 황혼에서 세상을 온화하게 물들이고 싶은 마음이 스며 나온다. 특히 ‘잠들러 간 사이에’는 고단한 인생의 끝에 평안한 휴식을 열망하는 마음이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에 얹혀 하늘로 비상한다. 쿠르트 마주어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반주하고 소프라노 제시 노먼이 노래한 버전을 추천한다.

어지러운 마음을 조율하는 해금 - 강은일의 ‘해금플러스 Vol.1 - 오래된 미래’

개성적인 해금연주가 강은일이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책 제목을 차용한 음반이다.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거기에 우리가 추구하는 미래의 이상이 있다’는 강은일의 소신을 담고 있다. 전체적으로 전통의 호흡에 충실한 해금의 선율이 따뜻하고 고급스런 화성 위에서 유장하게 펼쳐지는 가운데 약동하는 에너지와 신명도 함께 느낄 수 있다. 수록된 9곡 중 ‘초수대엽’과 ‘웡이자랑’, ‘오래된 미래’를 연속해서 들어보길 추천한다. 정가 ‘우조 초수대엽’의 가락 일부를 해금으로 표현한 ‘초수대엽’으로 어지러운 마음을 조율한 뒤 강은일이 직접 부른 제주도 자장가 ‘웡이자랑’을 통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이 주는 위로와 치유를 맛볼 수 있다. 타이틀 곡 ‘오래된 미래’는 줄풍류 영산회상 ‘타령’의 단아한 선율 속에 섬세하게 싹트는 미래의 희망을 감지한다.

굿 장단이 주는 카타르시스 - 박병천의 ‘구음 다스름’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소리와 장단’으로 유명했던 예인 박병천이 진도씻김굿의 여러 의식에서 사용된 음악을 작품으로 재구성한 음반이다. 전라남도 진도의 세습 무속 명가에서 어린 시절부터 전통 악가무를 익혔던 박병천은 굿의 문화적 가치를 무대예술로 구현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20세기 전통음악 최고 명반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이 앨범은 넋풀이, 시나위 살풀이, 용신풀이 등 총 5곡으로 구성된다. 우열을 가릴 수 없으나 특별히 1번 트랙 ‘넋풀이’를 권한다. “이별이야, 이별이야, 임과 날과 이별이야”로 시작되는데, 굿에서 죽은 이의 영혼을 달래고 위로하는 넋풀이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넋이로다, 넋이로다, 넋이로다”를 처연하게 읊는 구음이 징 장단과 조화를 이루며 내면 깊숙이 파고들어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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