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인간을 ‘호모 파베르(Homo faber)’, 곧 ‘만드는 인간’이라 정의했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사유하는 존재이기 이전에 이미 도구를 만들고, 흙을 빚으며, 직물을 엮어 삶을 꾸려온 존재였다. 한나 아렌트 또한 인간의 조건을 노동·작업·행위로 나누며, 제작 행위를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활동으로 보았다. 오늘 이 말을 다시 불러내는 이유는, 기술이 인간의 손을 대신하는 시대에 예술의 본질을 되묻기 위해서다.
만드는 행위는 인간 존재의 본질
손의 감각과 공예적 물성의 부상
예술과 공예·디자인 경계 모호
창조적 상생의 관계로 전환해야

우리는 흔히 예술을 미술관에 전시된 회화나 조각, 설치미술에서 찾지만, 예술은 오래전부터 일상 속에서 손으로 빚고 다듬는 행위와 함께해왔다. 호모 파베르의 개념은 공예와 디자인, 예술이 분화되어온 오늘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어디서부터 공예일까. 만약 예술이 근본적으로 ‘만드는 행위’에서 비롯되었다면, 공예야말로 예술의 가장 오래된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공예는 오랫동안 실용과 장인, 전통의 범주에 갇혀 주변부에 머물러 왔다.
회화와 조각이 ‘순수예술(fine art)’이라는 이름으로 미술관의 권위를 차지하는 동안, 공예는 생활적이고 기능적이라는 이유로 예술의 위계 아래에 놓였다. 미술관과 갤러리는 순수미술을 고상한 문화로 격상시키며 ‘상징자본’을 선점했다. 유명 작가의 명성과 결합한 원본성은 시장에서 막대한 가치를 창출했지만, 공예와 디자인은 쓰임새, 생활의 영역에 머물며 미학적으로 저평가되었다. 도자가 장식적이거나 실용적인 매체로, 직물과 자수가 여성적 영역으로 간주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산업화 이후 디자인이 대량생산과 미적 효율성의 도구로 성장하던 시기, 수공예는 더욱 고립되었다. 미술관과 미술 제도, 저널리즘은 순수와 실용의 이분법을 강화하며 편견을 재생산했다. 기능은 있으나 고급 예술로는 인정받지 못하는 애매한 위치, 그것이 공예의 오랜 현실이었다. 물론 이는 작가의 태도뿐만 아니라 제도 자체의 폐쇄성과도 연관된다. 그러나 3D 프린팅과 인공지능의 확산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손과 감각, 그리고 제작 행위의 가치를 새롭게 부각했다. 지난 십여 년간 각 지역의 전통 예술과 섬유 예술(fiber art) 같은 수공예적 방식과 물질성은 글로벌 미술 현장에서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미켈란젤로 재단이 주최하는 ‘호모 파베르 비엔날레(베네치아)’는 현대미술 중심 담론에서 소외되기 쉬운 장인정신과 수작업의 가치를 국제적으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한다. 국내에서는 청주공예비엔날레와 광주디자인비엔날레도 이러한 흐름을 꾸준히 이어왔다. 지난해 덕수궁미술관의 자수 전시는 호평과 함께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현대 작가와 디자이너들이 전통 장인과 협업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공예는 기능의 범주를 넘어, 예술과 디자인을 잇는 가교이자 새로운 지평을 여는 촉매로 주목받아 마땅하다.
현대미술은 뒤샹의 변기나 카텔란의 바나나처럼, 사유와 개념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호모 사피엔스’ 유형으로 진화했다. 반면 호모 파베르는 인간의 본성, 곧 ‘만드는 존재’라는 조건을 환기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만들고 구축하는 존재다. 이 시대 공예와 디자인은 그 경계를 넘나들며 예술의 본질을 다시 성찰하게 한다. 예술의 자율성과 디자인의 기능성 사이에서 공예는 언제나 그 접점에 서 있으며, 본질적으로 혼종적이다. 그 모호한 지점에서 가장 흥미로운 시도들이 움튼다.
그레이스 리스 마페이와 린다 산디노는 예술·공예·디자인 세 영역 사이의 불안정한 관계를 ‘위험한 유대(dangerous liaisons)’라 불렀다. 바로 그 간극이 오히려 창조적 긴장을 낳는다는 것이다. 서도호, 양혜규, 강서경은 전통 공예 기법을 현대적으로 변주해 작품 속에 녹여내고, 신상호, 김희찬, 문보리는 공예를 쓰임의 경계를 넘어 자율적 표현의 장으로 확장한다. 우리의 과제는 예술·공예·디자인의 경계를 고정된 틀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 위태로운 경계를 ‘상생의 관계’로 바꾸는 일이다.
21세기의 예술은 융합적이고 혼종적인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기술과 기계가 인간의 손을 대신하는 포스트휴먼의 시대, 우리는 ‘호모 파베르의 역설(손화철)’을 경험한다. 기계가 인간의 역할을 대체할수록 손과 몸의 감각, 제작 행위는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인공지능이 이미지를 만들고 조각을 대신해도, 예술의 본질은 여전히 감각과 물질의 언어 속에 있다. 예술은 사유의 산물이자 몸이 기억하는 행위이며,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다. 호모 파베르는 변화하는 시대의 인간 존재 조건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이준 부산비엔날레 집행위원장·미술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