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것의 새벽
데이비드 그레이버, 데이비드 웬그로 지음
김병화 옮김
김영사
불평등에 대한 사유가 세계화하고 있다. 시장경제와 세계자본주의가 확산하면서 특정 사회나 국가를 넘어 글로벌 차원에서 불평등 문제가 거론된다. ‘불평등 탓에 세상이 더욱 살기 어려워지고 있다’며 인간 조건과 미래에 대한 비관주의가 확산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와 영국 출신 고고학자 데이비드 웬그로는 광범위한 관련 연구를 바탕으로 불평등 불가피론을 반박하고 인류 문명의 다양성을 역설한다. 도시를 이뤄 사회 규모가 커지면서 불평등한 위계와 권위주의가 생겼다는 주장이 오늘날 주류학설이지만, 예외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이 인류가 농업혁명-도시-국가로 발전하면서 문명 속에 기본적으로 장착됐다는 통념을 전복하는 사례는 넘친다. 현재의 우크라이나 북부 비옥한 흑토지대에서 기원전 4100~기원전 3300년의 약 800년간 발전했던 메가 유적이 근거다. 선사시대 정착민들은 제법 큰 도시를 건설했지만, 부족장‧귀족‧관료 없이 평등하고 자율적인 가정을 바탕으로 시민의회를 구성해 자치를 했다. 오늘날 지방자치의 기원이 될 만한 인류학‧고고학적 연구다.
고대 인더스 문명은 지배계급도, 관리자인 엘리트도 없는 상황에서 상하수도가 완비된 청동기 문명도시를 만들어냈다. 멕시코 테오티후아칸에서는 군주제를 실시해 피라미드까지 건설했지만, 주민 중심의 공동체로 되돌아가 다가구 공동주택을 건설했다. 도시가 진화하면 국가가 된다는 통념을 통렬하게 뒤집는 증거다.
통념 전복 사례는 허다하다. 서구에선 민주주의‧자유‧평등의 개념이 서구 계몽사상가들의 업적이라고 설명하지만, 북아메리카 선주민에게도 눈앞의 이해를 넘어선 합리적 이성과 개인의 자유 개념이 있었다. 16세기 중남미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에르난 코르테스는 멕시코 남부의 틀락스칼라 부족과 동맹을 맺는 과정에서 이 공동체의 민주적 사회운영 시스템에 감명을 받고 기록을 남겼다. 당시 유럽은 권위적인 절대군주제의 시대였다.
신석기 시대 농업혁명으로 인간이 도시‧문명‧불평등의 족쇄를 차게 됐다는 주장은 인류문명 기원의 장점과 결점을 동시에 설명하는 주류 학설이다. 하지만 지은이들은 농업혁명이 실제로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약 3000년에 걸쳐 이뤄진 실험으로, 혁명적 사건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브라질 남비콰라족에서 농사를 지었다 말았다 하는 간헐적 농경 형태가 증거의 하나다. 이러한 느슨하고 유연한 ‘취미농사’는 선사시대 약자들이 생존을 위해 개발해 오랫동안 수렵채집과 공존한 생활 방식이었다. 농경은 실패 위험이 큰 선사시대의 ‘벤처 산업’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농경시대 잉여농산물의 등장으로 사유재산 개념이 생겼다는 게 오늘날 주류 학설이다. 하지만 지은이들은 이처럼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소유의 개념은 제의에 사용된 신성한 물건과 관련이 있다는 설명을 내놓는다. 호주 아란다족은 공동소유가 기본이지만 남성들은 토템문자가 적힌 나뭇조각이나 돌조각 등 신성한 물건을 성인식 제의에 사용한 뒤 개인 재산으로 간직한다는 게 근거의 하나다.
인류학과 고고학 연구 결과 선사시대 수렵채집인은 순진무구한 미개인도, 이기적이고 냉혹한 야만인도 아니었다. 그들은 성찰하는 능력과 정치적인 자의식을 바탕으로 적절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고민하고 행동했다. 그래서 여름에는 가족 단위로 분산돼 수렵채집을 했고, 겨울에는 한데 모여 평등하고 집합적인 삶을 살았다.
이처럼 지은이들은 인류 문명이 농업혁명-도시-국가 등의 과정을 거쳐 발전해왔다는 기존의 주장에 대해 인류학‧고고학적 증거를 하나하나 제시하며 반론을 제기한다.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기존의 ‘직선적 사회진화 이론’은 서구 중심적일 뿐 아니라 상업적 발전을 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다양한 사유와 생활 방식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사실 ‘사회적 불평등’은 계몽주의 이후 혁명가와 지식인에게 매혹적인 주제였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쓴 루소는 순진무구했던 수렵채집인이 농업혁명-도시-국가를 건설하면서 문자기록‧과학‧철학 등 긍정개념과 함께 가부장제‧상비군‧대량학살‧관료주의 등 부정개념도 함께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홉스는 인간이 원래 이기적 존재라 문명의 세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정치(politics)‧예절(polite)‧경찰(police)은 모두 고대 그리스어의 도시(polis)가 어원이다. 라틴어에서 도시를 가리키는 키비타스(civitas)는 예절바름(civility)‧시민의(civic)라는 문명적 낱말로 이어졌다.
과연 인간 사회에 지난 3만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앞으로도 계속 논쟁의 대상이 될 것이다. 지은이들이 이를 보는 시각의 지평을 넓혔다. 원제 The Dawn of Everything: A New History of Human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