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치열하게, 여전히 전광인답게…해결사 전광인, 그가 왔다!

2025-08-15

“다행이고말고. 속으로는 아주 만세를 불렀다니까(웃음).” 최근 만난 신영철 감독의 표정은 밝았다. “원래는 우리도 아웃사이드 히터를 아시아 쿼터로 뽑으려 했거든. 송 기자도 알다시피 그 자리 못 채우면 시즌 농사 쉽지 않잖아. 그런데 이게 웬걸. 전광인이가 갑자기 OK로 온다는 거 아냐. 그 말 듣자마자 딱 생각했지. 새판 한번 다시 제대로 짜봐야겠다고.”

다시 뛰는 OK저축은행

변화의 시작은 전광인

분골쇄신(粉骨碎身). 뼈를 가루로 만들고 몸을 부순다는 뜻의 사자성어다. 새 시즌을 앞둔 OK저축은행의 각오가 지금 그렇다. 지난 시즌 최하위에 머무른 이들은 다가올 시즌 다시 대권을 노린다. 땅에 떨어진 명예를 빠르게 되찾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말뿐인 다짐은 아니다. 올 초 이미 사령탑 교체로 새판을 짰다. V리그 최다승 기록(296승)을 보유한 베테랑, 신영철 감독이 2025~2026시즌부터 OK저축은행을 이끈다.

신 감독은 2023~2024시즌 우리카드와 결별하며 잠시 야인 생활을 했지만, 이번에 OK저축은행의 부름을 받으면서 1년 만에 다시 지휘봉을 잡게 됐다. OK저축은행이 그를 선택한 이유는 분명하다. ‘봄을 부르는 남자’, 포스트시즌 진출 보증 수표와도 같은 그에 대한 믿음이다.

지금까지 신 감독이 맡았던 LIG손해보험(현 KB손해보험), 대한항공, 한국전력, 우리카드 등 4개 팀 모두 봄배구 무대를 밟았다. 특히 하위권 팀을 맡아 단기간에 체질 개선에 성공한 사례가 많아 ‘재건 전문가’라는 별명도 따른다.

신 감독의 이 같은 면모는 한국전력 시절 빛을 발했다. 2013~ 2014시즌 최하위였던 팀을 단 한 시즌만에 3위로 끌어올렸다.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당시 그의 발자취가 다소 파격적이었다. 과감한 선수 기용으로 도박 수를 던졌는데, 그것이 적중한 것이다. 이 시기 토종 거포 서재덕을 아웃사이드 히터로 변신시킨 인물이 바로 신 감독이다. 또 아직은 햇병아리에 불과했던 전광인을 발굴해 중용했던 것 역시 그의 작품이었다.

이렇듯 변화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이기에 OK저축은행을 향한 외부의 기대는 작지 않다. 봄배구 전도사 신 감독의 명성이 이번에도 이어질지 시선이 모인다. 한 프로팀 관계자의 입에서는 이런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한동안 느슨했던 배구판에 다시 긴장감이 돌겠네요(웃음).” 팀 성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그의 행보를 기대하며 던진 말이다.

신 감독은 필요하다면 다자간 트레이드 같은 까다로운 일도 과감히 밀어붙인다. 그래서 그의 복귀 직후 기자들 사이에서는 “이제부터 이적시장 판도에 귀 쫑긋 세워야 한다”는 농담이 돌기도 했다. 그만큼 그가 팀 전력을 재구성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는 얘기다.

만인의 예상대로, 신 감독이 오자마자 OK저축은행은 곧바로 선수단 재편에 착수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화제였던 것은 역시 현대캐피탈과의 트레이드 소식이었다. 양 팀은 2001년생 신호진과 1991년생 전광인을 서로 맞교환했다. 이 과정에서 OK저축은행은 국가대표 아포짓 스파이커 신호진을 현대캐피탈에 내줬다. 대신 리그 최정상급 아웃사이드 히터로 평가받는 전광인을 데려왔다. 서로 가려운 곳을 긁었다는 점에서 양 팀 모두 만족할 만한 결과였다.

현대캐피탈은 아웃사이드 히터 허수봉과 레오가 주축으로 있는 팀이다. 두 명 다 공격력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럽다. 그러나 이 둘을 동시에 기용하려면, 그만큼 쏠리는 수비 부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공수 겸장 자원인 신호진의 합류는 이 균형을 맞출 열쇠다.

전광인은 지난 시즌 현대캐피탈에서 이런 리시빙 아포짓 스파이커 역할을 해냈다. 자신에게 꼭 맞는 옷은 아니었어도 그가 입었더니 그런대로 태가 났다. 덕분에 팀은 창단 첫 트레블(컵대회·정규리그·챔피언결정전)의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원래 자리인 아웃사이드 히터로서 100%를 보여주긴 어려웠다.

그런 그에게 OK저축은행은 최적의 환경이기도 하다. 지난 시즌 이 팀은 아웃사이드 히터 기근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천군만마의 등장으로 이들은 가장 큰 약점을 지우고 다시 출발선 앞에 섰다. 신 감독이 그의 합류를 그토록 반긴 이유다.

전광인의 영입이 확정되자 신 감독은 아시아 쿼터 드래프트 전략도 전면 수정했다. 처음에는 여느 팀처럼 아웃사이드 히터를 물색했다. 하지만 끝에 가선 결국 이란 출신 미들블로커 가지아니를 선택했다. 믿을 수 있는 왼쪽 공격수가 있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결과적으로 OK저축은행은 전광인 한 명의 영입으로, 좌우 공격과 중앙 높이의 동시 보강이라는 팀의 여러 가지 퍼즐을 한 번에 맞춘 셈이다. 물론 아직 세터 이민규의 부상 회복 등 해결할 과제는 남아 있다. 그러나 신 감독의 목소리에는 벌써 자신감이 넘친다.

“일단은 전광인이가 팀에 온 게 크지. 워낙에 배구를 잘하니까. 공격만 되는 게 아니라 수비까지 아주 깔끔하잖아. 실은 나도 이번에 OK로 오면서 나름 고민이 있었거든. 어떻게 해야 빨리 성적을 낼 수 있을까 하는 뭐 그런 것들. 지금은 처음보다 상황이 많이 좋아졌어. 외국인 선수 두 명도 예상 범위 내에서 나름 잘 뽑았고. 아직도 갈 길이 만 리지만 그래도 이제부턴 좀 더 빨리 걸을 수 있지 않겠어? 아니면 말고(웃음).”

소통으로 만들어 낸 원팀

베테랑의 품격은 달랐다

“트레이드 소식을 듣고 숙소에서 짐을 싸는데… 갑자기 눈가에 눈물이 맺히더라고요. 확실히, 쉬운 이별은 아니었나 봐요. 아무래도 8년이나 함께한 팀이니까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 전광인에게도 이번 이적은 복잡했다. 스스로 선택한 이별이 아니었기에, 마음은 더 무거웠다. 현대캐피탈은 그에게 단순한 소속팀 이상의 의미였다. 지난 시즌 창단 첫 트레블을 일궈낸 팀. 전광인은, 그 역사의 한복판에 있었다.

“배구 인생에서 액자처럼 걸어둘 수 있는 순간이 아닐까요. 시작도, 끝도 우승이었잖아요. 평생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아요(웃음).”

전광인은 2018~2019시즌 현대캐피탈 입단 첫해, 챔피언결정전 MVP를 수상하며 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2021년부터는 주장 완장을 차며 팀의 중심을 지켰다.

하지만 이제는 유니폼 색이 바뀌었다. 7년 만의 이적. 전광인은 OK저축은행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그리움은 있어도 미련은 없다. 오히려 그는 이 팀에서 마지막까지 뛰겠다는 각오를 내비친다.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도 있는 거잖아요. OK저축은행에서 은퇴한다는 각오로 남김없이 쏟아부으려고요. 선수로서 노력이든 팀에 대한 애정이든… 뭐든지 하나도 안 빼놓고 다요.”

이적과 동시에, 그는 자연스레 도전자의 자리에 섰다. 이제는 현대캐피탈이 아닌, OK저축은행의 전광인. 과거의 동료들은, 곧 코트 위의 상대가 된다. 낯선 환경, 새로운 유니폼. 하지만 심장은 이미 뜨겁게 요동친다. 잊고 지냈던 도전의 떨림. 승부사 전광인이 다시 깨어난다.

“챔피언 자리에서 내려와 처음부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기분이요? 당연히 설레죠. 승리를 위해 한 점 한 점 물어뜯는 치열함이야말로 스포츠의 진짜 재미잖아요.”

믿고 따를 리더도 있다. 신영철 감독은 전광인의 프로 첫 스승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광인이 한국전력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을 당시, 신 감독은 그를 5년간 지도했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죠. 어느 팀을 맡으셔도 포스트시즌 진출을 척척 이뤄내시잖아요. 지금 제가 펼치는 배구도 결국엔 다 감독님께 배운 거예요.”

팀에 합류한 뒤, 전광인은 한 가지 의문을 품게 됐다. OK저축은행이 왜 직전 시즌 최하위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본 OK저축은행은 하나 된 팀이었다. 분위기도, 대화도, 호흡도, 이미 하나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선수들끼리 서로 배구에 관한 대화를 정말 많이 나누더라고요. 솔직히 말해서 예상했던 것보다 팀 분위기가 훨씬 끈끈했어요. 음… 그냥 저만 잘하면 될 것 같은데요(웃음).”

처음인데도 어딘가 익숙한 느낌. OK저축은행에 합류한 전광인은 새로운 팀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다. 드래프트 동기이자 1991년생 동갑내기 정성현, 그리고 청소년 대표팀 시절부터 알고 지낸 송희채와의 재회도 반갑다.

“(송)희채와는 청소년 대표팀 때부터 계속 봐온 사이예요. 예전엔 선배라고 말도 못 걸더니, 지금은 뭐… 아주 편하죠(웃음). 배구 센스도 정말 뛰어나서 같이 뛰는 게 벌써부터 기대돼요.”

최근 훈련 중, 한 후배의 재능에 시선이 꽂혔다. 1998년생 미들블로커 박창성이다. 2020년 드래프트 전체 3순위로 입단한 그는 지난 시즌부터 팀의 주전으로 자리 잡았다. 2m 장신답게 존재감도 확실하다.

“밖에서 볼 땐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요. 막상 옆에서 보니까 가진 게 정말 많더라고요. 나이도 어리고, 한창인 때라 기대가 돼요.”

요즘 전광인은 스스로 ‘잔소리쟁이’를 자처한다. 훈련 중 후배들의 플레이를 유심히 지켜보고, 끝난 뒤엔 조용히 조언을 건넨다. 시간과 에너지가 드는 일이지만, 그는 이게 “선배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말한다.

“나이가 들수록 느끼는 건데, 배구는 절대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에요. 자유롭게 피드백을 주고받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러려면 당연히 선배인 제가 먼저 움직여야 하고요.”

이젠 후배들이 먼저 다가온다.

“형, 그땐 왜 그렇게 처리하셨어요?”

부담보다 신뢰가 커졌다. 후배들은 거리낌 없이 조언을 구하고, 전광인은 아낌없이 경험을 나눈다.

“어느샌가 후배들도 하나둘씩 마음을 열더라고요. 팀이 잘 되려면, 지금처럼 수평적인 분위기를 더 공고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후배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을 준비가 돼 있고요.”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그게 진짜 팀이 되는 길이라고 믿어요. 그래서 요즘은,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웃으려 해요.”

엇갈렸던 시간들을 지나

12년 만에 OK의 품으로

어쩌면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전광인과 OK저축은행은 이미 12년 전 한 번 스쳐간 적이 있다.

2013년, OK저축은행이 창단한 해였다. 신생팀에게는 드래프트 우선 지명권이 주여졌다. 모두가 1순위를 OK저축은행의 몫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해 1순위는 한국전력으로 넘어갔다. 1년 전 승부조작 사태 여파로 전력 공백이 컸던 이들에게 특별 지명권이 부여된 것이다. 그리고 그 1순위가 바로 전광인이었다. OK저축은행은 다음 순위로 밀려나며 그렇게 인연은 어긋났다.

그리고 12년이 흘렀다. 전광인은 다시 OK저축은행 유니폼을 입었다.

“그때랑 비교하면 달라진 건 나이뿐이에요. 배구에 대한 열정은 그대로고, 무엇보다 마음가짐은 훨씬 성숙해졌죠. 늦깎이 신인처럼 새롭게 시작해보려고요.”

그는 잠시, 첫 팀이었던 한국전력을 떠올리기도 했다. 감사의 마음이 크지만, 한편으론 지워지지 않는 아쉬움도 남아 있다. “팀에 우승을 안겨주지 못했다는 게 늘 마음에 남아요.”

가장 미안한 사람도 있다. 자신을 프로 무대에 세워준 첫 스승, 신 감독이다. 함께한 시간 동안 우승 반지를 손에 끼워주진 못했다.

“감독님이 계셔서 지금의 제가 있어요. 그런데 정작 감독님께는 우승을 한 번도 못 안겨드렸더라고요. OK저축은행에서는 꼭 선물해드리고 싶어요.”

그는 지금 다시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서 있다. 그리고 마침 팀도 변화를 앞두고 있다. OK저축은행은 2025~2026시즌부터 연고지를 안산에서 부산으로 옮긴다. 새로운 도시, 새로운 팬들. 그 변화는 전광인에게도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무대는 바뀌었지만, 고향 하동과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어머니께서 바로 전화하셨어요. 이제는 멀리 안 가고도 제 경기 보실 수 있게 됐다고요. 예전엔 대전이 제일 가까웠거든요(웃음).”

요즘 전광인은 고민이 하나 있다. 팬들에게 첫인사를 어떻게 건넬까. 몇 마디 말도 떠올려보지만 어쩐지 다 어색하다. 결국 그는 자신다운 방식으로 결심했다.

“첫인사는 역시 성적이죠. 강한 첫인상을 남겨야 팬분들도 경기장에 오시잖아요. 부산에 OK저축은행이라는 팀이 왔다는 걸, 제 플레이로 똑똑히 각인시켜드릴게요.”

선수로서 그의 목표는 여전히 명확하다. 우승, 그 외엔 없다. 성적 말고는 바라는 게 없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작지만 분명한 바람이 있다.

“나이가 들어도 성장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작년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요.”

올해로 서른다섯. 많은 선수가 내리막을 말할 나이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는다. 그런 통념에 갇히지 않는다.

“계속 부족한 점을 찾았어요. 그걸 채우려 애썼고요. 그래서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번 시즌도 마찬가지다. 같은 마음으로, 같은 자세로 준비 중이다.

“저번보다 더 나은 시즌. 그게 늘 목표예요.”

그는 믿는다. 지금 이 시간이, 누군가에겐 방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나이에 뛴다는 게 쉬운 건 아니죠. 그래도 제가 잘하고 있다면 후배들도 생각하지 않을까요. ‘아, 선수 생명은 이렇게도 길 수 있구나.’”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물론 전성기는 20대 중반, 30대 초반이라지만… 방법을 알면, 얼마든지 더 갈 수 있어요.”

그 자신이 그 증거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한때는 ‘혼자 하는 배구’라는 말도 들었다. 실수 하나에 표정이 일그러졌고, 감정은 그대로 팀 분위기에 스며들었다.

“많이 그랬죠. 리액션도 크고, 감정도 숨기지 못했고… 그걸 보는 동료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멈춘 건 상근예비역 시절. 처음으로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주어졌다.

“아, 내가 저랬구나. 내 행동 하나가 분위기를 바꿀 수 있구나. 특히 안 좋은 감정은 더 크게 전해지더라고요.”

말투는 담담했다. 익숙한 반성처럼, 마음속에서 오래 정리해온 이야기 같았다.

어느 날, 우연히 예전 경기 영상을 봤다. 그런데 몇 초 만에 꺼버렸다.

“너무 보기 싫었어요. 내가 봐도 그런데, 옆에 있던 애들은 어땠을까. 물론 경기력이 좋으면 분위기는 오르겠죠. 하지만 그건 잠깐이에요.”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내가 화낸다고, 팀이 좋아지진 않더라고요.”

그는 이제 안다. 예전엔 혼자 앞서 달리기에 바빴다. 실수 하나에 마음이 무너졌고, 그 감정은 말보다 먼저 팀 전체로 퍼져나갔다.

지금은 다르다. 코트 밖에서도, 삶의 여러 지점에서도. 그는 자신을 천천히 돌아봤다. 그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이며,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어느덧 그는, 누군가의 '기억에 남을 선수'를 향해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러는 사이, 그의 이름 앞에는 어느새 ‘전설’이라는 수식어가 하나둘 조심스럽게 따라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제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 수식어는 결국, 남들이 붙여주는 거잖아요.”

잠시 말을 아끼던 그는,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정말 그렇게 생각해 주는 분이 있다면… 그분 앞에서만큼은 부끄럽지 않은 선수가 되고 싶어요. 그 마음 하나로 지금도 뛰고 있는 거니까요.”

한국이 27년의 벽을 허물던 날

그곳엔 21살의 전광인이 있었다

“솔직히 그냥 ‘어, 이겼네?’라는 느낌이었어요.”

2011년 5월, 수원체육관. 한국 남자배구가 쿠바를 꺾고 역사에 새 페이지를 넘긴 날. 당시 성균관대 2학년이었던 전광인은 국가대표 데뷔전에서 블로킹 3개, 서브 에이스 2개를 포함해 양 팀 최다인 20점을 올리며 한국의 3-0 완승을 이끌었다. 1984년 이후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세계 최강 쿠바가 무너졌다.

“성인 대표팀 경기는 처음이었어요. 쿠바가 그렇게 강한 팀인지도 몰랐고요. 코치님이 ‘그냥 즐겨’라고 하셔서 정말 편하게 뛰었죠. 막내라 제 역할에만 집중했는데, 경기가 끝난 뒤 TV에서 제 얘기가 나오는 걸 보고서야 뭔가 특별한 일을 했다는 걸 알았어요.”

그런 전광인에게도 ‘작고 평범한 시절’이 있었다. 중학교 1학년, 신장은 겨우 163cm. 네트를 넘기기도 어려운 키였다.

배구와의 첫 만남도 우연에 가까웠다. 도내 심판이던 삼촌이 초등학교 배구부 코치와 이야기 나누던 중, 갑자기 전광인을 불러 소개했다. 코치가 “내일부터 나와보라”고 말한 게 시작이었다.

“처음엔 빵이나 간식 같은 작은 유혹에 끌렸죠. 한편으론 선생님들이 무섭기도 하고, 안 가면 안 될 것 같았어요. 그랬는데 하다 보니 점점 재미가 붙었죠.”

중학교 시절은 쉽지 않았다. 작은 키가 늘 벽이었다. 키를 키우기 위해 그는 식사 때마다 밥을 7~8공기씩 먹었다.

“정말 키가 크고 싶었어요. 밥을 7~8공기씩 먹고도 후식으로 식혜에 들어 있는 밥알만 골라 냉면 그릇째 담아 먹었죠.”

식당 이모님은 아직도 그를 ‘밥 많이 먹고 식혜까지 또 먹던 아이’로 기억한다.

노력은 결실로 돌아왔다. 중2에 173cm, 중3에 183cm. 급성장한 키와 힘은 곧 기량 발전으로 이어졌다.

“키가 크니까 힘이 붙고 다양한 공격이 가능해졌어요. 작은 키를 극복하려 했던 고민과 노력이, 성장하면서 시너지를 낸 거죠.”

동명고에 진학한 뒤에는 하종화 감독과 코치들의 열정적 지도 아래 배구에 완전히 몰입했다. 하루 4~5시간씩 개인 훈련에 몰두했다.

“게임에 빠진 아이처럼, 배구가 너무 재미있었어요. 시키지 않아도 계속 하게 되고 더 잘하고 싶었죠. 그때 제게 배구는 정말 놀이 같았어요.”

163cm의 작은 소년은 어느새 192cm 국가대표로 성장해 있었다. 콤플렉스를 노력으로, 즐거움을 실력으로 바꾼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2011년, 스물한 살 전광인은 27년 만에 쿠바를 꺾었다. 특별할 것 없던 시작에서 빚어진 기적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 2013년 전광인은 프로 무대에 뛰어들었다. 데뷔 시즌 정규리그 30경기 전 경기 출전, 616득점. 압도적인 기록이었다. 신인왕은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처럼 36경기였다면 점수를 더 냈을지도 모르죠(웃음). 그래도 제 신인 시절 기록만큼은 어디 가서도 자신 있어요.”

그러나 남들 눈엔 화려하게만 보였던 신인 시절에도, 그에겐 말 못 할 고충이 있었다.

“계속 지니까 패배에 익숙해지는 제 자신이 싫었어요. 몸보다 마음이 지쳐가는 걸 느꼈죠.”

그러던 시즌 도중, 세계 최고 수준의 이탈리아 리그에서 임대 제의가 들어왔다. 한국 남자 프로배구 사상 최초의 이탈리아 무대 진출 가능성에 배구계가 술렁였다. 하지만 그는 한국전력에 남았다.

“떠나지 않은 걸 후회하지 않아요. 제 실력을 키워준 한국전력에 잘할 때 보답하고 싶었죠.”

화려한 무대 대신 팀과의 의리를 택했다. 그 선택은 ‘특급 신인’에서 ‘리더’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런 전광인에게도 결국 한국전력과의 이별은 찾아왔다. 2018~2019시즌, 그는 현대캐피탈로 이적했다. 첫 팀에 대한 애정과 미안함이 컸지만, 동료들은 오히려 그를 응원하며 보냈다.

현대캐피탈에서 그는 다시 한번 성장했다. 공격 중심에서 벗어나, 혼자서 리시브 1,000개 이상을 소화하는 공수 겸장의 완성형 선수로 거듭났다.

“모두가 ‘너라면 된다’고 믿어줬어요. 감독님과 (여)오현이 형, 동료들의 믿음 덕분에 리시브에 자신감이 생겼죠.”

이적 첫해, 그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챔피언결정전 MVP에 올랐다.

시간이 흘러 2024~2025시즌에도 그의 존재감은 여전했다. 팀의 창단 첫 트레블을 이끌며, 다시 한번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냈다.

그리고 이제, OK저축은행에서 전광인은 또 한 번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있다.

“제가 지금까지 어디에서 뛰었든, 지난날의 전광인은 이제 없어요. 앞으로는 오직 OK저축은행의 우승만 생각하고 달릴 거예요.”

여전히 치열하게, 여전히 전광인답게. 전광인은 그렇게 다시 코트에 올랐다.

해결사 전광인, 그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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